청주남중-세광고 출신의 채연석 항공우주연구원장
“2005년 인공위성 발사도 순수 국내 기술로 할 것”

지난해 11월 28일, 각 언론사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액체 로켓 개발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비중있게 다뤘다. 따라서 외국의 기술이나 부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 국산으로 성공한 뒷얘기가 우리 모두를 흐뭇하게 했다. 더욱이 이 로켓 개발에 성공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채연석 원장은 청주 출신으로 청주남중-세광고등학교를 졸업해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 주었다. 고향을 빛낸 채 원장으로부터 액체로켓 개발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02년 11월 28일 우리나라는 항공 우주개발 역사를 다시 썼다. 3000여개의 부품을 100% 국내에서 만든 액체 로켓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성공시킨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연구원과 기술자 60여명은 몇달전부터 서해안 앞바다 작은 섬에서 추위와 싸우며 발사 시험 준비를 했다. 이 날 새벽 4시 우리나라 최초의 액체추진제 과학로켓 KSR-Ⅲ(Korea Sounding Rocket, 과학관측로켓)이 불을 뿜으며 서서히 발사대를 벗어나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채연석 항공우주연구원장(53)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었다.
당시의 심정을 채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실 성공 전까지 마음이 무거웠다. 예산지원이 충분치 못해 비행시험도 하지 못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로켓을 발사했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이고, 연구원들이 정말 대단하고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에서 9번째로 액체로켓 개발 성공
개발 예산이 부족해 비행용 로켓을 단 한 기만 제작했는데, 이 로켓을 계획에 따라 성공적으로 비행시킨 예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채원장의 말이다. 그만큼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낸 성공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로켓 기술의 확산을 우려한 선진국이 기술이나 부품을 이전해 주지 않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어 국내기술로 개발하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이번 액체 로켓 개발은 세계에서 9번째 성공으로 기록됐다. 고체추진제 로켓은 이미 93년과 98년 각각 KSR-Ⅰ과 KSR-Ⅱ라는 이름으로 개발됐다.
“로켓은 추진제에 따라 고체추진제 로켓과 액체추진제 로켓으로 나뉘는데 고체 로켓은 화약같은 고체연료를 이용해 10년 동안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대형 고체 로켓은 대형 미사일로 쉽게 바꿀 수 있어 외국으로부터 기술이전도 어렵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거부감을 보여 왔다. 반면 액체 로켓은 이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비행방향과 속도를 조절하기 쉬워 우주개발을 위해 여러모로 유리하다.”
그러므로 이번에 개발된 액체 로켓은 2005년 우리 힘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할 때 발사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인공위성을 우주로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켓이 필요한데, 선진국들도 인공위성 발사체로 사용하는 것이 액체 로켓이라는 것. 따라서 그동안 우리나라가 개발한 총 7기의 인공위성은 모두 막대한 외화를 들여 외국의 발사체를 이용했는데 이제 순수 국내기술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우리나라도 우주개발국가 대열에 진입하는 것은 물론 월드컵 4강신화를 능가할 정도의 이미지 제고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로켓 실험하다 고막 크게 다쳐
채 원장은 어려서부터 ‘못말리는’ 로켓 광이었다. 61년 ‘소련이 발사한 우주선이 지구를 한바퀴 돌았다’는 내용이 학교 게시판에 붙었을 때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고, 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해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딛었다’는 내용을 방송으로 접했을 때는 마당에 나가 한참동안 달을 바라본 그였다. 당시 로켓과 우주개발에 관한 기사는 빼놓지 않고 스크랩해 대학시절에는 웬만한 전문가 못지 않은 ‘로켓 박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말이다. “집이 청주시 석교동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든 ‘충북우주과학클럽’ 친구들과 무심천에서 로켓 실험을 많이 했다. 그리고 YMCA 내 고등학생 클럽인 ‘하이Y’가 미국 아폴로 달 착륙 사진을 전시하고 강연회를 열어 열심히 쫓아다녔다. 2학년 때는 로켓 실험을 하다가 한쪽 고막을 크게 다쳐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시절부터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분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던 채 원장은 과학써클을 만들려고 하는데 학교에서 써클 허용을 안해 “교육청에 가서 직접 허가를 받겠다”고 호기있게 나섰다가 교육청에 가서도 혼나고 돌아온 얘기를 전하며 당시 과학교사이자 태권도 지도교사였던 오연진 현 세광고등학교장에게 특히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그는 지난해 말 해마다 동문회에서 선정하는 ‘세광고등학교를 빛낸 인물’에 뽑혀 다시 한 번 존재를 드러냈다. 항상 학교 이름을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해 왔다는 그는 벌써 50대 초반에 소원을 이룬 셈이다.

고대로켓도 부활시킨 ‘로켓 광’
이 외에도 그는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다. 경희대 물리학과에 다니던 시절에는 ‘한국우주로켓클럽’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활동하고 이 때 연구한 내용을 월간 ‘학생과학’에 1년 반 동안 연재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화살을 장착한 로켓인 ‘신기전’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고, 세종 때 편찬된 문헌에서 설계도를 찾아내 국내외 학계에 보고했다. 이것은 현존하는 로켓 설계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93년, 로켓에 대한 그의 못말리는 열정은 ‘신기전’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직접 복원하는 단계까지 갔다. 대덕 연구단지의 갑천 고수부지에서 ‘신기전’ 발사틀에 1백발을 장착시킨 후 점화하자 ‘고대로켓’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100∼200m를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세종 이후 545년 만에 ‘신기전’이 부활하는 순간, 그는 대학시절부터 우리나라 로켓의 뿌리와 전통을 찾기 위해 애쓴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로켓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저서를 8권이나 펴냈다. 미국 미시시피주립대에서 항공우주공학 박사를 받은 채 원장은 항공우주연구원의 전신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 합류해 지금까지 국산 로켓 개발에 혼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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