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복 벗어던지고 빈민 속으로 들어간 정명현 수녀
노점상, 삯바느질 “성직자도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라"

   
▲ 수도복을 입지 않는 정명현 수녀는 사랑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사진=육성준 기자

누군가 귀띔을 해주기 전에 정명현(42) 수녀를 수녀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유의 긴 생머리가 아니라 짧게 자른 머리에다가 무엇보다도 수녀의 상징인 수도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명현 레지나 수녀가 수도복을 벗어던진 것은 1997년부터이니 이제 10년을 바라본다. 그러나 1983년 수녀회에 입회한 뒤 끊임없이 교회의 규율과 싸워왔으니 어쩌면 아예 수도복을 입지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수도 있다.

정명현 수녀가 즐겨입는 옷은 생활한복이다. 벙거지 모자까지 눌러쓰면 행색이 영락없는 비구니 스님이다. “동양적인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엡”라는 단순한 설명이 뒤따르지만 사실은 정 수녀의 인생관이 담겨있다. 가난한 사람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 수녀는 “천주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인정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자리가 가난한 곳에 있어야 한다”며 “베풀면 주종관계에 서기 때문에 그들과 수평적 관계에 서기 위해서 수도복도 거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난곡, 민들레공방의 주역
인천에서 태어난 정명현 수녀가 빈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했던 여동생의 영향이 컸다. 수녀가 돼 수녀원이라는 울타리 속에 있었지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인생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고 깊었던 것.

그가 고민의 결과를 행동으로 옮긴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1999년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개발이 시작된 관악구 난곡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빈민 사목을 시작했다. 8평짜리 달동네 주택을 얻어 공장에 다니며 저녁에 선교활동을 했다.

“수도복을 입고 입지 않고는 작은 한 점 차이지만 결국에는 많은 것들을 좌우한다. 달동네 주민들과는 언니, 동생 사이로 지냈고 애들은 이모라고 불렀다.”

정 수녀는 “이번 기사에서도 ‘수녀’라는 단어는 제발 빼달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정 수녀가 도시빈민들의 작업공동체인 ‘민들레 공방’을 만든 것은 이름이 꽤 알려진 모 생활한복 업체의 횡포 때문이었다. 옷값은 30만원을 호가하는데 한복 한 벌을 꿰매도 수공비는 1만원 정도에 불과하고 그 마저도 업체 사정을 운운하며 골탕을 먹여 평민들이 입을 옷을 우리가 만들자며 조합형태로 작업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달동네 주민들과 ‘하루 8시간씩 주 5일만 일하고 50만원씩만 받아가자’며 공방을 만든 뒤 10%를 육아기금으로 조성해 공방 옆에 공부방까지 운영함으로써 빈민들의 취업난과 육아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정 수녀는 또 서울대 앞에서 몇 달 동안 노점상을 하기도 했는데 “하루에 여덟 번이나 쫓겨다닌 적도 있다”며 “민중들이 얼마나 힘들고 뼈아프게 번 돈으로 교회가 굴러가는 지를 생각한다면 교회가 그렇게 커질 수 없다”며 뼈있는 말을 던졌다.

농촌문제가 빈민문제의 뿌리
대도시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그가 2002년 2월 돌연 충북 증평군 도안면의 농가주택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빈민문제의 뿌리가 농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난곡 주민의 80%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농촌출신인 것을 알고나니 농촌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길라잡이 역할을 한 사람은 천연염색 전문가인 연방희(54) 세무사다. 민들레공방을 운영하면서 생활한복 제작에 필요한 천연염색을 배우는 과정에서 연씨를 알게 됐고, 연씨의 공방인 ‘고래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또 올해 9월부터 시작한 농촌 공부방은 괴산군 사리면에 있다. 정 수녀가 운영하는 공부방은 민주시민이 되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민주시민’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의식의 성장은 긴 여정을 필요로 하는데, 공부방 안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내 실천하고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그 여정”이라는 것이다.

정 수녀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아이, 학부와 함께 하는 모임을 갖는데, 특별한 사유없이 두 번 불참하면 아이를 받지 않는다.

정 수녀는 “내년에는 아이들과 함께 사리면의 경계를 따라 탐사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면서 설레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을 내고 사는 집은 주변의 농가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정 수녀가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에 혼자 살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던 유품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할머니의 유족들이 태워버리려던 옷가지도 그대로 정 수녀가 입고 있다. 낡은 농도 그대로다. 심지어는 상여에 덮었던 천조각들을 기워 염색한 뒤 이불로 사용하고 있었다.

“생활의 철학이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다. 염색, 바느질로 꼭 필요한 용돈을 벌고 마당에 있는 텃밭과 도지로 얻은 밭뙈기를 일궈 먹거리를 해결한다. 그래도 부족한 것은 물물교환으로 바꿔 쓴다. 돈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정 수녀는 영성생활도 이 농가주택에서 해결한다. 따르는 신자들도 적지 않은데 때로는 부엌에서 때로는 정 수녀의 방에서 함께 예배를 올린다.

이처럼 수도복을 거부하고 교회 밖으로 나온 정 수녀는 그동안 규칙 준수를 강요하는 수녀회와 신경전을 벌였으나 올들어 이 모든 일탈(?)을 인정하는 ‘카테키스타회’로 소속을 바꿨다.

정 수녀에게 “헌금을 내는 신도는 있냐?”고 묻자 “우리는 그런 것 없다”면서도 부엌 한 구석에 있는 과일이며 쌀 등을 가리키며 “그래도 저런 거 들고 오는 것은 말릴 수가 없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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