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욱 충북교육발전소 운영위원.
최진욱 충북교육발전소 운영위원.

최진욱 충북교육발전소 운영위원

정치라는 단어 참 무겁다. 때론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는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다. 기름 값과 전기세를 올릴지 말지, 교원정원과 학급당 학생 수를 늘릴지 말지, 시험을 한번 볼지 두 번 볼지,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기까지 항상 어떤 딜레마들이 우리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학명은 물론, 셋만 모여도 정치가 발생한다는 말처럼 정치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

서양에서는 정치의 어원을 ‘폴리스’에서 찾는다. 시민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에서 일어나는 활동들, 정치는 생활이다. 시민 대중에 초점이 가 있다. 역사 시간에는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옳지 않은 것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으로 언명하고 있다. 그래서 동양 사람들에게 정치는 특정 부류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스리는 자(리더)’에게 초점이 가 있다. 하지만 다스리는 자의 솔선수범(修身)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각설하고, 정치 발생의 이유는 갈등이다. 생활 속 다양한 문제에서 비롯하는 갈등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수년전 한 교원단체 대표가 어떤 교육현안에 대해 교육청을 상대로 단식하고 있는 상황을 보고 도의회 모 의원이 당선되자마자 달려왔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 의원은 교육의원이기에, 교육정치인이기에 교육계의 갈등 조정에 두 팔을 걷어야 하지 않느냐고 소임을 피력했다.

비단 갈등론을 말하지 않아도 교육현장은 갈등 속에서 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의 교육과정에는 갈등을 수반하는 가운데 해결하면서 성장토록 하는 패러다임이 있다. 2015교육과정은 물론, 2022교육과정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데세코프로젝트라든지 프로젝트 수업이라든지, 협력학습이 그러하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숱하게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배우며 성장하게 하는 것이 훨씬 교육적이며, 예측불가능의 미래를 대비한 대처능력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쳇GPT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력을 키우는 것도 평소 세상의 갈등에 대해 정치적 해결력을 발휘하는 것과 분명 맞닿아 있다.

한 술 더 떠, 정치는 갈등해결이라는 종점에 머물지 않는다. 정책으로 실현하고, 제도를 바꾸며 문화를 만든다. 지속성을 지니도록 하며, 유사한 갈등이 발생하면 방향을 가지고, 변화한다. 물론, 그 방향이 그른 것도 있기에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교육의 큰 몫이 되고 있으며, 그러기에 교육현장에서 정치 영역은 더 커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교직원들은, 얼마나 정치 활동들을 하고 있는가? 얼마나 교육현장의 갈등을 찾아 제도적으로 해결해보려 하는가? 특히 리더의 ‘수신(修身)’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 리더들의 정치적 활동은 얼마나 적극적인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또 예측 불가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갈등과 쟁점을 찾고 해결하려는 데에 얼마나 머리를 맞대고 소통하려 하고 있는가?

최근 충북교육계에서 일고 있는 갈등과 그 갈등 해결을 위한 리더들의 움직임을 보면, 정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를 향해, 향수를 향해 막연한 되돌리기에 급급해 보인다. 다시 등교 시간이 빨라지고, 각종 시험들이 늘고 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과의 소통은 물론 학교 교육공동체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채 밀어붙이기를 하고 있다.

특히, 교육감은 정치적 결단을 내릴 필요가 많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단재연수원의 블랙리스트 건이 그러하며, 단재고 개교 건이 그러하며, 은여울 중·고 학생 시위 건이 그러하다. 문제의 요인에 천착해서 당사자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 충분한 절충안도 있어 보이지만, 통보식이다. 지나치게 일방적이며, 때론 보복성 느낌도 든다.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죽어도 안 된다는 식이다. 그것이 리더의 권위라 생각하는 것 같다.

새 교육감(정치인)이 들어섰다고 해도, 각종 관리자 교육에 ‘미래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교육감도 여느 강연에서 미래교육을 설파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충북교육의 기본방향과 주요사업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학교 현장에서 작동되는 일들은 아무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 ‘교육’에 진보가 어디 있고, ‘보수’가 어디 있는가? 미래교육에 좌도 우도 없다. 어제도 오늘도 아니고, 내일을 위해 어른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통제와 처벌만이 정답이 아니다. 나와 생각이 달랐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윗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고, 품는 정치적 행동이 지혜로운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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