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수동’3 수동 발전 동우회 백의현 회장
수동청년회, 새마을금고 창립에도 앞장선 만년 일꾼
제천시 한수면 송계가 고향인 백의현씨가 1953년, 청주시 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주성중학교와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졸업한 백씨는 1966년 청주지구 자동차검사장을 겸했던 아일공업사에 취업함으로써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1964년에 설립된 아일공업의 창업주는 백씨의 큰아버지인 백해석(1982년 작고)씨로, 백씨는 그 밑에서 경리업무를 맡아 일하면서 꿈을 키웠다. 아일공업은 당시 충북에 있던 유일한 자동차 공업사로 산판을 누비던 ‘GMC 트럭’이나 ‘신진 6톤’, 시발택시 등이 주 고객이었다.
“당시 충북의 차량 대수는 200~300대에 불과했지만 독점사업이다 보니 그런대로 장사가 됐다”는 것이 백씨의 회고담이다. 백씨는 “GMC 트럭 같은 것은 194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고물들이었지만 산판을 주름잡았고, 남주동 장터에서 인근 연풍장 등으로 장짐을 나르는 화물차 등도 단골 고객이었다”고 회상했다.
백씨와 백부(伯父)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시대의 경향을 빨리 읽었다는 것이다.
백부가 도내에서 유일한 자동차정비업소를 세워 독점사업을 한 것처럼 백씨도 1969년 아일공업사 안에 ‘아일대리점(한국자동차보험)’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손보영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자동차보험업계는 한국자동차보험이 독점으로 영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백씨는 별다른 경쟁없이 업계에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백씨는 “한참 잘 나갈 때는 고객이 3000명에 달해 대여섯 명의 직원을 두고 대리점을 운영했지만 보험회사가 10여개로 늘어나고 IMF로 인한 실직자들이 보험업계로 뛰어들면서 지금은 별볼일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도 관리하고 있는 단골고객이 600여명에 달한다니 마르지 않는 샘을 판 셈이다.
▲ 70년대 청주지역의 연탄공장과 신진 6톤 화물차. | ||
백씨는 사업에 있어서 민완함을 발휘한 것처럼 동네 발전을 위해서도 늘 주동적으로 앞서나갔다. 1975년 예비군훈련에서 만난 동네 청년 25명을 규합해 수동청년회를 만들었는가 하면, 1980년 새마을금고(이사장 김병문)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 초대 감사를 맡았다. 당시 20여명이 출자한 자본금은 약 200만원 정도였는데, 출자자들이 매달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직원들의 월급을 줄 정도였다.
수동은 새마을금고를 제외하고는 은행지점 하나 없는 금융의 불모지인데, 중앙발권은행인 한국은행 충북본부가 수동에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90년에 발족한 수동발전동우회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달동네 이웃들을 돕기 위한 따뜻한 모임이다. 발기인은 45명이었지만 15년이 흐르면서 33명이 남았다. 하지만 매달 28일 월례회를 갖고 1인당 1만5000원에서 2만원씩 걷어온 기금이 이제는 3000여만원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관내 경로당에 난방비 조로 200만원씩 지급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학자금을 지급하는 것이 수동발전동우회의 주요 사업. 그러나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온 오래된 이웃끼리 한달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애경사에 동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우암산 기슭에 살아 공기좋고 더딘 걸음이라도 시내 가깝고 서민적인 동네라 누구를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백씨의 수동 예찬이다. 그러기에 “수동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우암산에 아파트가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 백씨의 지론이다.
백씨는 다만 “복개도로를 사이에 두고 북문로 2,3가와 맞닿아 있는 지역은 북문로와 마찬가지로 상업지역으로 지정돼야 수동이 낙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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