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일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 공동체’의 문제로 전환됐습니다. 충북인뉴스는 위기의 시대에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는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풀꿈재단과 함께 1주일에 1회씩 매주 ‘풀꿈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구요?

글 : 공방 ‘오름’ 대표 전소민

청주시 가경동 가경천의 살구나무길
청주시 가경동 가경천의 살구나무길

영영 사그라들 것 같지 않던 폭염이 입추가 당도하던 날 바로 누그러지며 여름내 눅눅했던 습기도 서둘러 물러가고 9월로 접어들어서는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다.

기후변화로 위기의식이 증폭되고 있다. 자연이 아직 기회를 더 줄 요량인것인지, 절기까지 넘어설 만큼의 위기가 아닌것인지 세계 각국에서 들려오는 폭염, 홍수, 산불 등 기록적인 기후변화의 징후들과 달리 비교적 너그러웠던 우리의 여름에 일단 안도하면서 가을맞이 채비로마음이 분주해진다.

고온과 습도에 마비되다시피 했던 의식들이 속속 제자리를 찾으면서 점점 무디어지는 감성의 끝자락을 악착같이 부여잡을 기세로 감성 충만한 선율들을 소환한다.

들뜬 마음으로 만추의 정취를 미리 당겨보기도 한다.

입추를 거쳐 처서를 지나니 나무들도 가을 채비를 한다.

습도가 높은 날일수록 미동도 하지 않던 나무들이 사방으로 얽히고 설킨 가지 틈새로 회절되는 햇빛과 겹겹이 포개진 나뭇잎이 뭉개져 일체가 된다.

가을을 머금은 미풍까지 합세하여 탄소와 미세먼지라는 고약한 기운들을 흡수하는 대신 신산한 기운들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중년 고개를 넘으며 뻑뻑해진 몸의 근육과 함께 옹색해진 마음의 근육이 동시에 이완됨을 느낀다.

11월 즈음이면 다음 해 살림살이를 위해 어김없이 낡은 잎들을 털어내버리는 늦가을 나무들은 을씨년스럽고 스산하다.

생활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회상과 성찰의 틈도 열어둔다.

우울이나 고독 같은 관념적이고 전형적인 가을언어가 아닌 우리 삶을 더욱 단단하게 지켜줄 껍질을 생성해내는 언어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 또한 속된 인간의 관점일지언정 의식을 풍부하게 성장시키고 때로는 고질적인 성장통의 치유제가 되어주기도 하는 나무들의 담백한 속성이 고맙다.

나무의 담백한 존재감이 유감스럽게도 편의와 이윤을 창출하는 자원으로 치환되어버린지 오래다.

택지개발을 명분으로 하루아침에 숲을 밀어내는 일은 이젠 고전이 되어버렸다.

해마다 봄이면 이런저런 구실로 가로수가 통째로 베어진다.

청주시 가경천 살구나무길
청주시 가경천 살구나무길

이제 막 봄물이 파릇하게 오른 굵은 가지들을 간판을 가린다거나 전선줄과 엉켜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질게 쳐내기를 반복한다.

올 초에 종교인이자 환경운동가인 한 개인의 집요한 고발로 드러난 산림청의 전국 산지의 무자비한 벌목현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법규문제로 다행히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주민투표로 아파트 단지내 주차장 확장을 위해 거목이 된 느티나무들 일부를 벌채하기로 결정하기도 했었다.

30여년 가까이 살아온 동네 가경천에는 살구나무길이 있다.

봄꽃과 짙은 녹음, 단풍들로 구성된 변화무쌍한 정경과 함박눈이 내리면 숨막히는 선경을 연출하며 사계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아름다운 길이다.

주민들에게는 쉼터가 되어줄뿐더러 누군가에게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고, 사연 많은 누군가는 살구나무에 기대어 쓰린 상처를 달랬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랬던 곳이 1년 전, 홍수예방을 위한 하천정비사업을 명분으로 주민들과 시민들에게 그 어떤 설명도 없이 수백그루의 나무를 벌채해버리는 참극이었다.

지금은 공사용 장비들이 살풍경하게 널부러져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속이 아려온다.

공방 ‘오름’ 대표 전소민
공방 ‘오름’ 대표 전소민

 

30년 된 살구나무의 벌채는 30년의 추억과, 쉼터와, 마음의 안식처를 벌채한 것이나 다름없다.

살구나무길에 담긴 소소한 일상의 흔적들을 벌채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가경천의 선경을 담아낼 수 없다.

나무는 인간의 뾰죽한 역사까지 품어주고 우리와 공존해온 공동체의 일원이면서 관조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잠시 왔다 가는 여행자에 불과하다. 나무는 여행자들의 삶의 궤적을 차곡차곡 기록해둔다.

무한히 뻗어올라 여행자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해주는 통 크고 속 넓은 기록자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제 몸통까지 모조리 내어주는 동화속의 나무가 마냥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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