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60년 흘렀지만 아직도 등기부 정리중
일본인들 금광 찾아 영동, 옥천 등에 몰렸던 흔적 뚜렷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나 창씨 명 소유로 넘어갔던 충청북도내 토지 가운데 독도 면적의 약 23배에 이르는 땅이 아직도 일본인 명의로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인 명의 토지는 영동과 옥천지역 등에 집중돼 있어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금광을 찾아 나섰던 일본인들이 남긴 수탈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충청북도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충북 도내에서 일본인 또는 창씨 명으로 소유권을 행사한 토지 가운데 아직 등기부가 정리되지 않은 토지는 2004년 11월25일을 기준으로, 3411필지에 422만498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독도 면적 18만902㎡의 23배에 이르는 것이다.

▲ 영동군의 일본인 거주지역. 목재건물은 충북에서 처음으로 생긴 면화공장. 정부가 일제강점기의 동양척식회사 등 일본의 법인과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대상으로 1985년부터 2003년까지 1·2차 권리보전 조치를 해 대부분 국유화시켰음에도 이처럼 일본인 명의의 토지가 남아있는 것은 이 가운데 일부가 창씨 개명을 한 한국인 소유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개인 소유인데다 주인을 알 수 없어 세금도 매기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귀속재산처리법 제2조와 특별조치법 부칙 제5조를 근거로 이들 일본인 명의 토지에 대한 조사를 거쳐 일본인 소유일 경우 국가에 귀속시키고 소유주가 창씨 개명을 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에 국유지 등기 대상에서 제외할 방침이다. 일본인 명의 토지에 대한 권리보전 업무는 재정경제부 소관 업무로 지정됐으며,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재정경제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2004년 4월부터 권리보전 조치에 들어간 상태다. 그러나 서울과 경기도 등 수도권 지역에서는 이른바 민적부 등을 위조해 수백억에서 수천억에 이르는 일본인 명의 토지의 소유권을 가로채려는 사기사건이 잇따라 적발되고 있어 국유재산 관리에 철저를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이 9월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논의 중인 상황에서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나 개인을 상대로 제기한 토지반환소송이 재개돼 법 제정 여부와 소송 결과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영동농업전수학교 학생들이 일본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하고 있다. / 사진제공 영동군
일본인 명의 토지, 옥천·영동·청원에 집중
현재 충청북도에 남아있는 일본인 명의 토지는 모두 422만4985㎡. 이 가운데 80%에 이르는 334만2197㎡가 옥천군(873,283㎡), 영동군(767,209㎡), 청원군(742,622㎡), 괴산군(516,199㎡), 제천시(442,884㎡) 등 5개 시·군에 집중돼 있다.
이는 청주와 진천지역의 일본인 명의 토지가 각각 4만5873㎡와 5만8746㎡에 불과한 것과 비교할 때 그 편중성이 두드러진 것이다.

특히 1930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국세보고서 자료에 실린 충북지역 시·군 인구를 고려할 때 옥천과 영동 등에 일본인 명의 토지가 집중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30년 당시 충북의 인구는 90만226명으로, 청주군의 인구가 17만5751명에 이른 반면 옥천과 영동은 각각 7만7040명, 8만6057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충북에 거주한 일본인은 8030명으로 도내 인구 100명당 1명 꼴에 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직업을 보유한 37만3103명 가운데 일본인은 316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부선 따라 금광을 찾아 몰려든 일본인들
그렇다면 왜 인구가 적은 옥천, 영동 등에 일본인 명의 토지가 집중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일제가 침략과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한 경부선철도의 노선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충북개발연구원 김양식박사는 이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이주는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특히 영동군 용화지역 등에는 상당수의 금광이 있어 일본인들이 몰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경부선 철도는 1901년 8월 서울 영등포에서 북부기공식을 갖고 한 달 뒤 부산에서 남부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들어가 1905년 전 구간을 개통했는데, 충북지역의 경우 영동 추풍령역을 시작으로 황간역, 영동역, 옥천역을 거쳐 대전으로 빠져나간 뒤 부강, 조치원역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다 영동군지역은 일제 당시 용화면 월전리와 황간읍 원촌리 등 10여 곳에 금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이른바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일본인들의 골드러시가 이뤄졌던 곳 가운데 하나다.

영동군 향토사연구회 김기헌(80)자문위원은 “경부선 시설을 하면서 농장이나 상권은 물론 고리대금업까지 영동의 경제는 완전히 일본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며 “인구도 그때와 다름이 없고 도시계획도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김기헌 자문위원은 또 “1942년 가을부터 일제가 영동읍 매천리에 군수공장을 짓는다며 파놓은 굴이 있는데, 토굴 가운데 일부가 최근 모 업체에서 포도주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는 시설”이라고 설명했다. 영동 일원에 이같은 토굴은 80여개나 된다.

제2의 ‘강두운평’ 사건을 막아라
문제는 일본인 명의나 창씨 명으로 된 토지가 문서감정제도의 허점을 노린 토지 사기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004년 6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두운평(江頭運平) 사건은 허술한 국유지 관리와 문서감정에 경종을 울려준 사례다.

사건의 전말은 서울에 사는 김 모(59)씨가 ‘해방 뒤 국가에 귀속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시가 1300억원 상당의 땅이 원래 선친의 것이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가 결국 원고 패소 판결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씨는 마포구청에 있는 민적부를 위조해 자신의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강두운평으로 창씨 개명을 한 것처럼 속이고 문서감정사까지 매수해 1심 법정을 감쪽같이 속였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강두운평’이 실존했던 일본인임을 제보하면서 결국 들통이 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한 1940년 보다 20년이 빠른 1920년대에 창씨 개명을 했고 구청과 법원의 민적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등 허점이 많았음에도 판사와 검사가 감쪽 같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결국 민간 연구소 소속 한 연구원의 제보가 없었더라면 1300억원이 넘는 국가재산이 사기꾼의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함께 친일파 이완용, 송병준 등의 후손이 매국의 대가로 치부한 재산을 되찾겠다며 재산반환 청구소송을 잇따라 제기하고 있는 것도 해방 60주년의 의미를 무색케 하고 있다.
이처럼 매국적 친일파 소유의 땅은 전국적으로 수백만에서 수천만평에 이르며 현 시가로 수백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의 분석이다.

이에 따라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환수 소송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최용규(열린우리당)의원 등의 발의로 국회에 계류 중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의 제정이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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