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 몇 단계’를 속보 기사로 접하는 세월을 살고 있다. 이번 연말연시 특별방역의 일환으로 5인 이상 모임 금지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모든 국민들의 새로운 생활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집단적인 생활을 즐기지 않았던 내게는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이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비장애인, 성인, 남성,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사람, 중증질환이 없는 사람, 반려자와 함께 전셋집에 거주하는 사람인) 나처럼 타인과 헐거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별 탈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의 감상이란 이와 비슷할 거라 추측한다.

 

누군가는 바이러스와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코로나19가 1년 가까이 지속되고 그 기간만큼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2020년 12월 28일 청와대 국민청원 누리집에는 “코호트 격리돼 일본 유람선처럼 갇혀 죽어가는 요양병원 환자들을 구출해주세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서울 구로구 미소들요양병원과 요양원에서 지난 15일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29일까지 환자 94명을 비롯해 간병인 53명, 간호사 9명 등 모두 175명이 감염됐다. 그중 환자 3명은 병상을 기다리다가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코로나 격리’ 요양병원·요양원 집단감염은 예고된 비극인가> 2021년 1월 3일자 한겨레 기사 참고)

코로나19 총 사망자들의 감염경로를 분석한 위 기사 자료에 따르면 요양병원(24.1%), 요양원(9.3%), 노인복지센터 등 사회복지시설(5.4%) 등 사망자의 38.8%가 노인 관련 시설을 통해 감염된 사람들이었다. 기타 의료기관(10.6%)을 통한 감염까지 포함하면 절반에 달하는 사망자들이 의료시설이나 복지시설을 통해 감염되었다. 고령자와 중증환자의 치사율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감염률이 높다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코로나19 감염 양상과 대응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음성지역 언론

내가 살고 있는 충북 음성군은 어떨까? 2021년 1월 3일 기준 음성군의 총 확진자 수는 186명이다. 그중 무려 119명이 단 한 곳, 현대소망병원에서 감염되었다.(환자 104명, 직원 15명) 현대소망병원은 지역 내 유일한 정신병원으로, 5천명이 거주하는 생극면에서도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병원에는 환자 860여명과 230여명의 직원들(의사, 간호사, 간병인, 행정직원, 청소원, 건물관리원 등)까지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소망병원은 12월 17일 6명의 환자 및 직원이 집단 감염되자 곧바로 코호트 조치에 들어갔다. 음성 지역신문 중에는 코로나19 확진자 수만 업데이트할 뿐 감염경로 자체를 공개하지 않은 신문이 대다수고, 이를 보도한 신문들 중에서도 현대소망병원 이름 자체를 밝히지 않는 신문들이 많았다. 이쯤 되면 코로나19 관련 기사를 지역 언론 차원에서 보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코호트 격리인가, 방치인가

더군다나 ‘코호트 격리’ 사실 자체를 보도하는 신문은 거의 없었다.(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음성타임즈 외에는 없었다.) ‘코호트(동일집단) 격리’란 1인 1실 입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확진자, 접촉자 등을 각각 동일집단으로 분류하여 집단적으로 격리시키는 것이다. 지역감염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이긴 하나 격리 대상자들 간의 감염률을 월등이 높아지므로 정부 또한 ‘일상적으로 권장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한다. 감염을 우려하는 외부인들의 관점에서 코호트 격리가 안도감을 주는 방식일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인의 입장을 잠시만이라도 상상해본다면 아수라장 아닌가. 문제는 격리 대상자들에게는 상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서울 구로구 미소들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언론보도를 통해 요양시설에서 코호트 격리의 문제점이 여실히 들어났다. 코호트 격리는 어느 시설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확진자, 위험도가 높은 접촉자, 위험도가 낮은 접촉자, 감염 가능성 없는 일반 환자 등등의 세부적인 기준으로 나누어 각각 분리 조치를 시켜야 한다. 그러나 의료법 내지 노인복지법 기준에 따라 운영되는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대부분 다인실로 구성되어 있고 화장실, 샤워실 등의 공간 분리도 어렵다. 이런 환경에서 코호트 격리가 내부 감염을 충분히 억제하는 조건에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정부는 뒤늦게 코호트 격리 조치를 보완하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현대소망병원에 격리되어 있는 환자들과 노동자들이다. 언론은 잠잠하고, 음성 군수의 관련 담화문은 누리집 첫 화면에 2주째 같은 내용으로 걸려있다.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염시키거나 감염되었는데 병원에서 정확히 어떤 격리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음성군도, 언론매체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있다. 갇혀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해지는 바 없이 고요하다. 이 고요함이 섬뜩할 정도로 무섭다.

 

'사회적 거리두기' VS '물리적 거리두기' 논쟁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용어가 코로나19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 유럽이나 영미권에는 이 용어를 두고 논란이 크게 일었었다. 예컨대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초창기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회적 단절이나 고립’으로 읽혀질 위험이 있어 일관되게 ‘물리적 거리두기(Physical dsitancing)’로 표현했고, 그렇게 사용하도록 권고하였다. 독일의 경우 “Abstand halten”(거리 유지)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고, 말 그대로 1.5-2M 공간적 거리두기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출처: 독일연방정부 누리집(사진: imago images/Hartmut Bösener)
출처: 독일연방정부 누리집(사진: imago images/Hartmut Bösener)

“우리는 ‘물리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로서 말하는 것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할 방법을 찾고, 인터넷과 다른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결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정신건강이 신체건강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2020년 3월 20일 WHO 신종질병팀장 마리아 반 케르크호베)-필자 역

 

미국에서도 알드리치 박사(Daniel Aldrich, Northeastern University 정치학/공공정책학)를 중심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대신 물리적 거리두기라는 용어를 써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중 보건 및 역학 사전에 있는 용어이기는 하나 대중들에게 의미론적으로 적합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재난 발생 후 가장 효과적으로 생존하고 재건하는 커뮤니티에 관한 연구를 근거로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적 유대를 강화해야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은폐하는 것

요양병원, 요양원 그리고 정신병원 코호트 격리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국내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은 편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돌봄 노동’과 같이 사회적 유대에서 비롯된 노동에 의지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장애인 거주시설 집단감염 문제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집회, 시위가 제한받고 있다는 점도 사회적 고립에 기여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단순히 물리적 거리두기로서 정책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단절과 고립을 야기시키고 있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책이 –용어가 가진 문제점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그동안 이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코로나19 이전에도 말 그대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정책은 마치 코로나19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은폐한다. 우리는 노인들을 요양시설과 양로원으로, 정신질환자는 정신병동으로, 장애인은 시설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렇게 사각지대를 만들어 놓고 그곳을 –60대 여성노동자들로 대표되는 이들의- 그림자 노동을 통해 가까스로 돌아가게끔 방치했다. 차이점은 코로나19 이전에는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코로나19 상황에서는 ‘확진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물리적 거리두기 속에서 연대하기

어쩌면 우리가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거리를 두는 사회는 공공성을 담보한 공동체로서 기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취약한 계층에서 시작되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은 그들의 가족에게로, 이웃에게로, 그곳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큼,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 에너지를 쏟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우린 불안과 공포감 속에서 전자에 몰두한 나머지 후자를 나 몰라라 했다. 알드리치 박사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은 공동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피할 수 있었고 집에서 모든 사람이 나올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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