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활짝 웃고 있는 김인자 할머니. (사진=꽃동네)
생전에 활짝 웃고 있는 김인자 할머니. (사진=꽃동네)

장애인으로 태어나 어려움 속에 살다 지난 1985년부터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던 김인자(세실리아. 75) 할머니가 지난달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선종했다.

김인자 할머니는 뇌성마비로 인해 양손을 전혀 쓸 수 없었고 두 발로 모든 일상생활을 하던 분이었다.

학교에도 전혀 다닐 수 없었고 동생이 학교에 갔다 와 숙제하는 모습을 보며 어깨너머로 한글을 배웠고 그 이후로는 주로 집안에서 독서로 모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김인자 할머니는 생전에 “닥치는 대로 읽었어. 그때 읽은 책이 몇 트럭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35년 전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뜨자, 자신은 꽃동네에 가서 살 것이니 도와 달라고 주변에 부탁했고 얼마 후 음성 꽃동네에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집에서는 주로 방안에서만 살았는데 꽃동네에 와서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 김인자 할머니는 이후 자신보다 몸이 더 불편한 가족들을 두 발을 통해 돕기 시작했다.

머리도 빗겨주고 때로는 식사 수발도 하면서, 늘 특유의 농담으로 주변을 즐겁게 했다.

특히 김인자 할머니는 ‘꽃동네 장애인 시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고 배영희 씨와 단짝으로 지내기도 했다.

전신마비와 시각 장애인이었던 고 배영희씨는 ‘생각하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세 가지’ 뿐이라며 자신의 현실을 시로 표현한 ‘나는 행복 합니다’를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분이었다.

두 발로 배영희 씨의 일상생활을 도우며 한 방에서 살아가던 김인자 할머니는 배영희 씨가 먼저 선종한 이후 건강이 나빠져 노인전문요양원인 부활의 집에서 생활하다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인곡자애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김 할머니는 지난 2014년에는 꽃동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자신이 발가락으로 접은 종이학을 직접 선물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사후에 안구와 장기, 조직기증을 원해 유서까지 발로 직접  써서 보관해 왔지만 지병으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할머니의 장례식은 코로나19로 인해 간소하게 치러졌다.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는 장례미사 강론을 통해 “김인자 세실리아 자매님은 발로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수를 놓고 종이학을 접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장애인 연금 중 일부를 모아 더 가난한 해외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분들을 위해 내어 놓던 분”이라며 생전의 김 할머니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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