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웅 작가, ‘기억전쟁’ 원작으로 ‘악마의 일기’ 출간예정
“나에게 만화는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방식”

박건웅 작가(왼쪽)와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대표(오른쪽)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건웅 작가(왼쪽)와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대표(오른쪽)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40년 일제가 조선의 강제수탈을 한창 자행하던 시절,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666의 악마표식이 있었다. 부모는 이 아이가 앞으로 불행을 몰고 올 것이라 생각하고 방안에 가두어 키운다.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퍼지며 소년은 점점 불길한 존재로 불린다. 해방이 되고 좌우의 극한 대립을 목격하면서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소년과 아버지는 이유도 모른 채 소집되어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소년은 그제서야 자신이 사람이 아닌 악마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머리에 구멍이 났어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쫓아다니던 동네의 소녀 시신을 본 소년은 소녀가 써가던 일기장을 발견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일기장에 써내려간다. 처절한 죽음을 수없이 목격한 악마는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되고, 인간이 악마보다 더 악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충북보도연맹 정리한 ‘기억전쟁’ 원작으로 만화책 출간

오는 12월 출간될 ‘악마의 일기’ 시놉시스다.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책의 내용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스포’하다니……. 작가에게는 큰 실례지만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의미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악마의 일기’는 충북의 보도연맹 사건을 총 정리한 ‘기억전쟁’을 원작으로 한다. 70여 년 전 충북 곳곳에서 발생한 처절한 죽음을 만화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화지만 전혀 ‘만화스럽지’ 않은 책,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됐지만 철저히 진실에 기반한 만화책이다.

‘기억전쟁’은 충북역사문화연대 박만순 대표가 16년간 충북의 2000여개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며 취재한 기록물이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백구의 시신더미 속에서 자신이 직접 바느질해준 바짓단으로 남편을 찾아낸 아내, 보도연맹원이 아닌데도 이름이 같아서 총살된 남자, 총 8발을 온몸에 맞고도 살아난 임산부 등 피맺힌 사연 43편이 담겨 있다.

박만순 대표는 “작가주의 만화가인 박건웅 작가가 ‘기억전쟁’을 원작으로 삼아 만화책을 만든다니 무한한 영광”이라고 전했다.

‘기억전쟁’의 피맺힌 사연들은 박건웅 작가에 의해 소년(악마)의 시선으로, 진솔하면서도 생생하게 재구성될 예정이다. 또 특유의 흑백 및 목판화 기법으로 강렬하지만 서정적으로 충북의 보도연맹 사건을 하나하나 그려낼 계획이다.

 

박건웅 작가
박건웅 작가

 

작가주의 만화가 ‘박건웅’

박건웅 작가는 대학(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후 줄곧 장편·역사 만화를 주로 그리는 ‘작가주의 만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가주의 만화란 유럽에서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르는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말하는데, 인문·사회·예술적 성향을 강하게 표현하는 만화를 말한다.

박 작가가 작가주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입학 직후 벌어진 강경대군 치사사건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죽음이 나에게도 올 수 있겠구나’ 생각했고 학생회 활동(미대 학생회장)을 하며 그림으로 정권에 저항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은 당시 대학가에 걸려있던 걸개 그림과 닮았다. 목판화의 재질이 느껴진다. 굵은 선은 거칠고 투박하게, 가는 선은 서정적이고 구슬프게 다가온다. 또 흰색과 검정색만을 사용해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흑백 이미지는 비용 절감도 되고 독자들에게 상상력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빨간색을 쓰면 독자들이 빨간색으로만 인지하지만, 흑백을 사용하면 독자들이 다양한 색을 인지하거나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박건웅 작가
박건웅 작가

 

20여 년간 굴곡지고도 아픈 근·현대사 다뤄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한명이었던 박 작가는 대학 졸업 후 20여 년 동안 굴곡지고도 아픈 근·현대사를 많이 다뤘다. 무려 1000페이지가 넘는 장편만화 ‘꽃(빨치산 이야기)’부터 독립운동사를 다룬 ‘제시이야기’, 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인혁당 사건을 그린 ‘그해 봄’, ‘노근리 이야기’, 그리고 이명박 정권 시절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한 ‘삽질의 시대’와 촛불혁명, 세월호 사건까지 굵직굵직한 근·현대사가 그의 손에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첫 장편만화 ‘꽃’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다. 정말 배고팠던 시절 긴 호흡으로 탄생시킨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음 300페이지까지는 그냥저냥 했는데 그 후에는 너무 힘들어서 중단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등 다른 돈벌이를 해가면서 만화를 그린다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러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지원사업을 통해 700만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1년 동안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죠. 꽃을 출간하고 나니 장편도 이제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장편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이후 ‘꽃'은 프랑스에서 출간됐고, ‘노근리이야기’는 이탈리아에서 출간됐다.

박건웅/북멘토
박건웅/북멘토

 

예술가에게 기억은 ‘일종의 책임’

그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일까?

박건웅 작가는 이미 2015년 최용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통해 보도연맹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흑과 백만을 사용하고 거칠고 투박한 목판화의 느낌으로 강렬하지만 담담하게 당시 고통과 비극을 전달했다. 그런 박 작가가 다시 한번 보도연맹을 다루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박만순 씨가 무려 16년간 2000여 마을을 직접 다니며 취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취재한 내용은 모두 보물 같은 것이고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고 또 너무 빨리 잊히는 요즘, 기억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일상인 요즘, 기억하기 위해 작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만화가이자 예술가인 그에게 기억은 일종의 책임감과 같다. 불행한 역사라도 계속 기억하고 다뤄야 불행한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민간인이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이 역사 속에 그냥 묻혔기 때문에 5·18이라는 사건이 발생한건지도 모릅니다. 무참히 민간인을 학살한 일이 다시 반복된 거잖아요.”

박 작가는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특별히 더 기억하고 싶은 사건으로 5·18, 4·3, 그리고 세월호 사건을 꼽았다.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기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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