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혔던 시각장애인
홍승옥 도비아, 80세 일기로 영원한 안식

1981년 겨울 ‘사랑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가족들과 함께(왼쪽 끝 최귀동할아버지, 다섯번째 도비아 씨와 부인 세실리아 씨)

(음성타임즈) 지난달 20일 아침 7시 30분 음성군 금왕읍 금왕성당에서 한 의인의 장례미사가 봉헌됐다.
고인은 초기 꽃동네의 산 증인으로 사랑의 삶을 살며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던 홍승옥(도비아. 80)씨였다.
이날 장례미사에는 유가족, 오웅진 신부를 비롯 예수의꽃동네형제·자매회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는 강론을 통해 도비아 씨의 일생을 소개하며 “고인은 평생을 장애인의 몸으로 어렵게 살아왔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내놓았다”며 안식을 기원했다.
그러면서 “고인은 사랑의 삶을 살다 가셨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며 부인과 자녀들을 위로했다.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와의 특별한 만남

아들 혼배미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도비아 씨 부부와 미사를 주례한 오웅진 신부
1986년 꽃동네 행사에서 오웅진 신부가 도비아 씨 부부를 소개하고 있다.

고인은 1939년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죽고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에서 자랐다. 
세 살 때 눈병을 앓게 되었지만 변변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결국 두 눈을 잃고 만다.
장애인들이 천대받던 당시 가족들로부터도 외면 받은 고인은 차가운 거리로 나서게 된다.
전국을 떠돌며 문전걸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던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바로 음성군 금왕읍.
그 시절 금왕읍은 금광 촌으로 어느 정도 돈이 돌아가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냥으로 살아가는 걸인들도 많았다. 
지팡이를 짚고 거리를 떠돌던 고인과 당시 무극성당 신부였던 오웅진 신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1976년 무극성당에 부임한 오 신부가 최귀동 할아버지를 만나 움막 속의 죽어가는 걸인들을 위해 ‘사랑의 집’을 지어 입주한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오 신부의 배려로 그는 ‘사랑의 집’에 머물며 지쳐있던 몸과 마음을 회복한다.
신앙생활도 시작됐다. 
오웅진 신부는 그에게 천사 라파엘의 도움으로 부친의 눈을 고친 ‘도비아’를 세레명으로 주었다. 
그리고 고인은 그 곳에서 현재의 부인인 안상분(세실리아) 씨를 만나게 된다. 서로 장애가 있었지만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게 했다.
1980년 5월 오 신부는 무극성당(현 금왕천주교회)에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주례하고 혼배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해 잔치도 열어 준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남편과 일급지체 장애를 가진 부인의 일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겨울철 연탄불 구멍을 맞추기도 버거운 난관의 연속이었다. 
당시 오웅진 신부는 고인을 위해 특별한 연탄집게를 만들어 시범을 보이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부부를 응원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1980년 5월 11일 당시 무극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마친 후 인사하는 도비아 씨 부부
사랑의 집에서 살아가던 도비아 씨 부부

1남 1녀를 키우며 오순도순 살던 고인의 평생 꿈은 돈 백만 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평생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었기에 동전이라도 얻으면 곧바로 저금을 하곤 했다. 저축을 시작한지 15년 만에 통장의 돈이 백만 원이 된다.
몇 날 며칠을 잠을 설치며 기뻐했던 그는 곧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평생 꿈인 백만 원은 모았지만 이 돈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다.
무극성당에 나가 기도하기를 몇 번째, 당시 본당 신부였던 오웅진 신부의 강론이 그를 붙잡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어도 사랑하지 못할 만큼 가난하고 아픈 사람은 없습니다”
“몸이 병들면 누워서라도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명령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돈을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해 써 주세요” 
당시 사랑의 집에 함께 살던 사람들 중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많았다. 
저녁이 되면 구걸한 돈으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이 가운데 정 모씨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도가 심했다. 
정 씨는 술을 좀 자제해 몸이 좋아지면 집을 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인이 되어 다시 무극성당에 나타났다. 어김없이 손에 묵주를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다시 모셔와 건강을 회복시켜 놓으면 또 나가서 폐인이 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를 지켜보던 고인은 평생 모은 전 재산 백만 원을 들고 무극성당으로 오 신부를 찾아간다. 
오 신부에게 돈을 건네며 도비아 씨는 말했다.
“이 돈을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오 신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알기에 선뜻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망설이는 오 신부에게 고인은 “제 평생 꿈이 백만 원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돈을 모았고 이 돈 때문에 수 없이 고민하고 기도했습니다. 오 신부님이라면 이 돈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저보다 더 잘 써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돈을 놓고 돌아갔다.

 

백만 원 때문에 고민에 빠진 꽃동네 오웅진 신부   
도비아 씨가 놓고 간 백만 원을 놓고 오웅진 신부도 고민에 빠진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기도하며 기다렸다. 몇 년이 지난 후 꽃동네는 맹동면 현 부지에 자리를 잡고 현대식 집을 지어 나간다. 
노숙인 시설이 지어지고 정신 요양시설이 건립된다.
1986년 준공식을 하는 날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메웠다. 
오 신부는 그 자리에 도비아 씨 부부를 초청했다. 단상에 오른 도비아 씨 부부를 행사 참석자들에게 소개하며 받은 돈 백만 원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후 ‘사랑이 사랑을 부르는 벅찬 기적’이 계속된다.
마침내 고인이 내 놓은 백만 원이 기초가 되어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시설공사가 시작된다. 
꽃동네에 마련된 1,200평의 알코올요양원이 바로 그 곳이다. 백만 원은 어느새 12억 원이 되어 있었다.

지난달 20일 도비아 씨 장례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오웅진 신부와 유가족

알코올요양원 입주식을 하던 날 술 때문에 그렇게 속을 썩이던 정 씨가 목에 꽃다발을 걸고 첫 입주자가 되었다. 
부인의 손을 잡고 현관 앞에 서 있는 도비아 씨에게 한 수녀가 물었다.
“아저씨 기쁘시죠?” 
고인이 말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잘 살면 더 바랄게 없어요”

 

도비아, 꽃동네 낙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다

꽃동네낙원 정진석 추기경 센터의 제대 뒤에 봉안된 홍승옥 도비아 씨
홍승옥 도비아 씨 영정

그동안 금왕읍에서 효자로 소문난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과 함께 살아오던 그는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장례를 치르고 있는 아들에게 오 신부가 물었다.
“내가 뭐 좀 도울게 없을까?”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는 저희도 나이가 들고 저희 힘으로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성한 아들은 이미 부친의 유지를 받들고 있었다.   
세상에 사랑을 가르쳤던 고인은 꽃동네낙원 정진석 추기경 센터의 제대 뒤에 봉안됐다.  
‘굿바이’ 도비아…하늘나라로 돌아간 꽃동네 천사.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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