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권 「추석 만월」 전문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 것을 포대기에 엎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찍으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송진권 「추석 만월」 전문(시집 『자라는 돌』에서)

 

그림=박경수

정현종 시인은 ‘사람이 풍경인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고 노래했지요. 이 시야말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고통이니 슬픔 같은 말들을 빼버린다면 인생은 지극히 무미건조해질 겁니다. 진정한 고통 없이 진정한 기쁨 또한 없습니다. 고통은 인생을 숙성시키는 백화수복 한 병이지요. 야반도주한 딸이 돌아와 눈물 찍으며 구워낸 조기를 안주 삼아, 각다귀 같은 사위 놈이 따라주는 정종 한 잔에, 한 이태 새까맣게 탄 홀아비의 가슴속이, 그 숱한 애잔함이나 눈물 같은 것이 한 번에 쓰윽 닦여집니다. 거푸 마신 술에 거나해진 아비의붉은 얼굴처럼 추석 만월이 솟아오르고요. 외롭고 옹색하기만 했던 홀아비의 집안 구석구석 축복처럼 달빛이 넘칩니다. 늙은 아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지요. ‘아,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만은 아니구나. 살아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삶이 갈 때까지 가서야 결국 눈물 짓게 하는, 슬픔과 하염없음이, 상처와 시련이 이렇게 곡진하게 공명을 주는 시는 흔치 않습니다.

곧 추석 만월이 다가옵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올 추석은 이 홀아비의 풍경만한 만월이 우리들의 쓸쓸한 고향 처처에 솟아오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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