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구신화 네번째 이야기

노인이 예리한 눈빛으로 사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렇게 다시 물었다.

"왕께서 직접 내려주신 이름이라니요? 아 아니... 그 그걸 어, 어떻게...."

청년은 즉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속시원히 말을 해보게나. 자네 진짜 이름이 어떻게?"

"하, 하지만 말입니다. 어차피 제 이름자를 모르고 계시온데 제가 적당히 꾸며가지고 말씀드려도 이를 확인해 보실 수 없는 것 아니옵니까? 사실 따지고보면 이 세상에 이름 따위가 무슨 상관입니까? 개를 개라고 이름지어 불러주니까 개일 뿐이지, 개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이 당장 돼지새끼로 변하기라도 합디까? 그러니까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그냥 간단히 '구'라고만 불러주십시오."

청년이 이번엔 사정을 하듯이 말했다.

"어허! 참으로 답답하네 그려... 자기 이름자도 확실히 대주지를 않고, 게다가 자기 아버지란 사람의 함자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자기가 그 사람 아들이라는 걸 우리들한테 증명한단 말인가?"

노인이 다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어, 혹시 생김새 같은 걸로 확인을 해보시면 안될까요? 남들이 그러는데 저와 돌아가신 아버님이 빼다박듯이 닮았다고 하던데..."

청년은 이말엔 자기 나름대로 꽤나 자신이 있는지 큰소리로 말했다.

"에이, 이 사람아! 아니, 도대체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저 멀리 추운 북쪽 지방에서 산을 타고 내려왔다는 사람들치고 자네처럼 두 눈이 양 옆으로 짝 째어질 듯이 가느다랗고 광대뼈가 툭툭 불거져나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게다가 온몸이 짓무르고 부스럼이 자주 생겨나서 옹두꺼비들처럼 보이던데.... 으흠흠.... 그래도 자네 얼굴은 그나마 말짱하게 보이니 다행이로구만..."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 역시 이곳에 오는 도중 온몸에 피부병이 돋아나서 거의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다행히 말끔하게 나아가지고 지금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청년이 가볍게 한숨을 몰아내쉬면서 대답했다.
(작가 주: 옛날, 북쪽 지방에 살던 북방계 사람들이 산맥을 타고 한반도 남쪽 해안 지방으로 내려왔을 때 급격한 기후 변화탓으로 온몸에 피부병이 돋아 두꺼비같은 몰골로 되어지곤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 조용진 교수저 : 한국인의 얼굴 참조)

"자, 어쨌거나 이제 한가지라도 제대로 말을 해보게나. 자네 진짜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노인은 똑같은 말을 자꾸만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 자기 딴에도 지겹고 귀찮은 듯 있는대로 인상을 팍팍 찡그려가며 다시 물었다.

"글세 몇 번씩 다시 물어보셔도 저로선 역시 똑 같은 대답을 해드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구'라고만 간단히 불러달라니까요."

청년 역시 이젠 조금 귀찮고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으음... 그럼 말일세. 자네 혹시 '구' 대신, '벌'이라는 이름을 써보는 건 어떠한가?"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었다.

"네? '벌'이요?"

"그렇다네. '벌' 말일세. 벌!"

"싫습니다. '벌'이라고 하니까 마치 제가 누구한테 벌을 받는 거 같기도하고, 하루종일 꽃을 찾아가 앵앵거리며 꿀을 모으는 벌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어감상으로도 너무 이상하고 촌스러우니 전 사양하겠습니다!"

청년이 강력히 부정을 하는듯 고개를 좌우로 절래절래 흔들어 대며 말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청년의 이 말이 채 끝나자마자 주위에 둘러서있던 몇몇 노인들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대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청년은 두 눈을 껌뻑거렸다.
잠시 유쾌하게 웃고난 연장자 노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함뿍 머금으면서 청년에게 다시 말했다.

"이보게! '벌'이라는 건 말일쎄. 자네가 아버지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옛날 이곳에 처음 왔었을 때 여기서 써먹었던 이름이라네. 그러니까 자네가 아버지 함자를 한사코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구만....."

"네에? 그, 그렇습니까?"

청년은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아무튼 좋아. 그럼 자네를 이제부터 '벌구'라는 이름으로 불러주도록 하겠네."

"아, 아닙니다. 어, 어떻게 감히 아버님께서 쓰셨던 함자를 아들인 제가 그대로 사용을 합니까!"

청년은 크게 당황을 한 듯 두 손을 앞으로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어허! 아까 자네 입으로 그러지 않았나? 그 사람의 아홉 번째 아들이라고.... 그러니 이곳에 왔던 '벌'이란 사람의 아홉 번째 아들이란 뜻으로서 우리가 '벌구'라고 불러주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창피하고 또 뭐가 불만이란 말인가? 벌구! 내말 제대로 알아들었나?"

노인이 약간 언성을 높이며 청년에게 소리쳤다.

"아, 알았습니다. 그 그럼..."

이제 '벌구'라는 이름이 새롭게 붙여진 청년은 크게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려댔다.

바로 이때였다.
이곳에 모여있던 마을사람들 중 어느 누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며 큰소리로 외쳤다.

"아, 잠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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