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인이 알아두어야 할 친일파 4

대한민국 청주경찰서 초대서장 이명흠
만주사변‧중일전쟁 당시 독립군 소탕 공적으로 일제로부터 훈장
일제 패망 당시 조선총독부 마지막 청주경찰서장 지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 미군정 청주경찰서장으로 유임돼 승승장구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흠. 1922년부터 해방때까지 조선총독부 경찰로 재직하며 독립군을 소탕하는 동 항일투쟁을 탄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흠. 1922년부터 해방때까지 조선총독부 경찰로 재직하며 독립군을 소탕하는 동 항일투쟁을 탄압했다.
청주청원경찰서(옛 청주경찰서) 누리집.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흠을 초대 경찰서장이라며 사진까지 실어 게재했다.
청주청원경찰서(옛 청주경찰서) 누리집.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흠을 초대 경찰서장이라며 사진까지 실어 게재했다.

 

대한민국 청주청원경찰서(옛 청주경찰서) 누리집 역대 서장을 소개하는 창에 제일 앞줄에 서있는 인물이 있다.

일본명 ‘고토야마 젠(琴山泉)’이다. 청주청원경찰서 누리집에는 창씨명 대신 이명흠(李明欽, 1902~1973)이라고 소개했다.

이명흠은 일제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모두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는 국세조사기념장과 훈8등서보장을 받았다.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에서 비적(=독립군)을 처단하는 등 공을 세웠다는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선 ‘근정포장’을 받았다. 근정포장은 주로 공무원에게 수여되는데, 공직생활을 하면서 공적이 우수한 자를 수여대상으로 삼는다.

2025년 하반기 퇴직공무원 정부포상 대상자 추천 유의사항에 따르면 ‘근정포장’은 30년에서 ~32년 근속기록이 있는 공무원을 대상으로 했다.

이명흠은 일제 조선총독부 소속 경찰로 1922년 경부보로 시작해 1945년 8월 15일까지 재직했다. 만23년을 조선총독부의 경찰로 지낸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 치하 경찰국에서 3년 경찰생황을 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최소 4년 이상 경찰생활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명흠은 1949년과 1950년 육군 대위와 소령으로 재직 한 뒤 다시 경찰로 돌아와 경찰전문학교에서 총경으로 재직했다.

이명흠은 2025년 근정포장 추천기준으로 보면 일제강점기 경찰경력 23년과 미군정 치하와 대한민국 경찰기록을 다 합쳐야 수여자격을 갖추게 된다.

 

독립군을 소탕해 혁혁한 공을 세우다

일제가 1934년 수여한 만주사변 종군기장. 이명흠은 만주사변 당시 독립군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만주사변종군기장을 수여받았다. 
일제가 1934년 수여한 만주사변 종군기장. 이명흠은 만주사변 당시 독립군을 소탕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만주사변종군기장을 수여받았다. 

 

1931년 9월 일제는 만주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병참기지를 만들기 위해 침략전쟁인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군은 만주지역을 점령한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얼굴마담을 내세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설립힌다.

이명흠은 1934년 일제로부터 ‘만주사변종군기장’을 수여받는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조사에 따르면 이명흠은 1931년 9월부터 1934년 3월 31일까지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경부로 재직하면서 육군(=일본 관동군)의 비적소탕 및 군대 군용품의 수송에 관한 사무에서 공적을 세웠다. 여기서 비적은 ‘독립군’을 말한다.

1937년 일제는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 즉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조서에 따르면 이명흠은 이 기간 ‘잠과 휴식도 취하지 않고(불면불휴)’ 총 63회에 걸쳐 군수품 수송 및 경계 업무를 진행했다.

또 독립군 등의 활동을 막기 위한 접경지역 경계업무에 밤낮으로 앞장섰다.

이런 이명흠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1941년 ‘훈8등 서보장’ 훈장을 수여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승승장구

이명흠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3월 조선총독부 경시로 승진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찰 계급은 순사, 순사부장, 경부보, 경보, 경시로 구성됐다. 일제의 경찰직 계급 중 최고 직급(고등관 6등이상)으로 대형경찰서의 서장을 맡았다.

이명흠은 경시로 승진하면서 조선총독부 청주경찰서장으로 부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왔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주경찰서장 이명흠을 그대로 유임했다.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그의 출세가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49년과 1950년 대한민국 육군 대위와 소령으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다시 경찰로 돌아왔다.

충청북도와 강원도 경찰청 부청장을 지낸 뒤, 1952년에는 대한민국 경찰전문학교 교무과장으로 경찰생활을 이어갔다.

결국 이명흠에 대한 단죄는 없었다.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근정포장’이란 훈장까지 받았다.

그가 죽은지 52년이 흘렀어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명흠의 영예는 청주청원경찰서 누리집에 ‘청주경찰서 제 1호서장’으로 사진까지 게재된 채로 반짝반작 빛나고 있다.

 

 

친일반민족 행위자 초대 청주경찰서장 이명흠(李明欽, 1902~1973)

창씨명 : 琴山泉 (고토야마 젠),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孝悌)동 24-9

1902.12. 출생

1922.2. 제3회조선총독부 도경부보 시험합격

1923. 평안북도 의주경찰서 경부보

1928. 평안북도 벽동경찰서 경부보

1929~1935. 평안북도 정주경찰서 경부

1932.10. 일본정부로부터 쇼와25주년 국세조사 기념장.

1934. 일제 침략전쟁 만주사변 공로로 ‘공로 갑’ 상신.

1936~1937. 평안북도 강계경찰서 경부

1938~1941 평안북도 신의주경찰서 경부

1940. 일제 침략전쟁 중일전쟁 공로로 ‘공로’ 상신

1941~1943. 평안북도 경부

1941.7. 일본정부 훈8등 서보장 수여.

1945.2. 조선총동부 경시 승진. 청주경찰서장(1945.3.1.)

1945.10.21.~1946.3.19. 미군정 하 청주경찰서장

1946.3.19. 미군정 충청북도 경찰부장 대리

대한민국 충청북도 경찰부 차장, 강원도 경찰청 부총장

1949년 육군 헌병대위

1950년 육군 헌병소령

1952.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경찰전문학교 총경(교무과장)

1973. 사망

※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근정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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