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5일, 박달재 정상에서 ‘육삼정 의거 92주년 기념식’ 열려
충북 출신 이용준 애국지사, 백정기‧이강훈 등과 육삼정 의거 계획
1932년에는 주중 텐진 일본영사관에 폭탄 투척
충주출신 류자명, 진천출신 박기성 지사도 함께 참여
‘흑색공포단’ 출신… 일제 주요인사 및 밀정 암살 등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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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는 충북 충주시에서 ‘의병의 고장’ 제천시로 넘어갈 때 거쳐야 하는 고갯길이다. 반야월이 곡을 써 널리 알려진 ‘울고 넘는 박달재’에 나오는 바로 그곳이다.
반야월은 “한사코 우는 구나 박댈재의 금봉이야”처럼 ‘금봉이’의 사랑 노래만 부른 것은 아니다.
“올려라 히노마루(일장기) 빛나는 국기
우리는 신의 나라 자손이란다
임금께 일사보국(一死報國) 바치는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거리 끼겠소”


이는 반야월이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만든 노래 ‘일억총진군(一億 總進軍)’의 가사 중 일부다.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 기꺼이 일제국주의의 총알받이가 되라고 선동한 노래다.
박달재 정상 바로 밑 제천시 소유의 땅에에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아부한 노래를 만든 반야월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박달재 정상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단암 이용태(李容兌, 1890~1966) , 여산 이용준(李容俊, 1907~1946) 선생의 흉상 및 추모비가 자립잡고 있다.
두 분은 형제로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에서 출생했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인물이다.
애국지사 이용태 선생은 대종교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년 만주에서 일제에 체포돼 징역 8년 형을 언도받아 1945년 8월 해방을 맞을 때 까지 옥고를 치뤘다.
흑색공포단과 육삼정 의거, 그리고 이용준

이용준 지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우리나라 나이로 13에 참여해 체포됐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눈을 뜬 이 지사는 1925년 제천공립보통학교(현 동명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1930년 중국 만주로 건너간 뒤 이듬해인 1931년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 조직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해 무력적인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 12월에는 실행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 입단했다.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이용준 지사는 1931년 우당 이회영 선생의 권유로 남화황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일제는 이 조직에 대해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독립하게 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여 무정부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상해방면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단체”라고 규정했다.
또 흑생공포단에 대해서는 “일본의 입헌군주제 등 일체의 권력을 배격하고, 전 세계에 참된 자유 평등한 사회의 건설을 궁극적 목적으로 상해 방면에 중국인, 조선인, 일본의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조직된 비밀 결사체”라고 했다.
1940년 이용준 지사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한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에는 이 지사의 행적이 세세하게 나열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지사는 일제에 부역하는 친일 조선인들을 위협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펼쳤다.
1932년에는 애국지사 원심창과 유기석 등과 함께 중국 텐진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1933년에는 그 유명한 ‘육삼정 의거’에 착수했다.

공훈사료전시관에 따르면 육삼정 의거는 1933년 3월 17일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이강훈이 상해 육삼정에서 일제의 당시 주중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을 폭살하려던 일이 거사 직전에 발각돼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1933년 남화환인청년연맹 내 결사단체 흑색공포단에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국 국민당 당수인 장제스를 매수하고, 국민당에 친일적 인물을 양성하고자 중국요리점 ‘육삼정’에서 연회를 개최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당시 일제는 중국 북부를 다시 침략하기 위하여 군사적으로 또 외교적으로 온갖 연막 전술을 다 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남화한인청년연맹 흑생공포단의 의열 투사들이 분석 파악하고 그 외교상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일제의 주중공사을 폭살하기로 계획했다.
백정기, 원심창, 이용준 지사 등은 폭살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자를 정했는데, 이 기회가 독립운동자의 죽음의 장소라 생각해 이 의미있는 일들을 모두 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모두 서로 자기가 하겠다는 상황이 벌어졌고 결정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추첨을 통해 애국지사 백정기와 이강훈이 뽑혔다.
이강훈 지사는 추후 이때를 회상하며 “3·1운동 이후 독립 전선에 투신하며 만주 벌판과 중국대륙을 종횡 분주하면서 인간으로서 혹은 독립운동자로서 고기(육체) 값을 할 기회만 찾으면 최후의 투쟁으로 인생을 결산할 것인데 이 때가 바로 그 기회였으니 누가 놓치려고 하겠느냐”고 술회했다. (이강훈 회상록 ‘독립운동반세기’ 1972.)
하지만 거사는 실패했다. 내부에 침투한 일제의 밀정에 의해 계획은 고스란이 파악됐고, 결국 거사 직전 실행 애국지사 백정기와 이강훈은 붙잡혔다.
이용준 지사의 활동은 육삼정 의거 실패이후에도 계속됐다.
1935년 3월에는 애국지사 정화암과 함께 엄형순·이규창 등으로 하여금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인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총살 처형하도록 했다. 1937년에는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항일투쟁에 여념이 없던 이 지사는 1938년 12월 18일 마침내 1933년 ‘아리요시 아키라’ 일본 공사의 암살계획 혐의로 북경(北京)에서 체포됐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1940년 11월 20일에 경성(京城)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강도미수, 폭발물 취급법 위반 및 살인미수라는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위대한 업적, 소박하지만 소중한 기념식


앞서 서술했듯이 충북 제천시 박달재에는 전혀 화합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우주 ‘친일 VS 항일’이 공존한다.
“올려라 히노마루(일장기) 빛나는 국기 우리는 신의 나라 자손이란다”고 노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반야월의 노래비와 제국주의 일본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의열투사 ‘이용준’의 동상과 추도비가 맞선다.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발로 무산됐지만, 하마터면 이곳에는 반야월 기념관도 들어설 뻔 했다.
오는 15일 11시에 이곳에서 소박한 행사가 열린다.
제천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리학효)와 민족문제연구소제천단양지회는 ‘육삼정 의거 92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주최측에 따르면 참여자는 채 30여명이 되지 않을 예정이다. 국가보훈처등에 기념식 예산을 신청했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며 지원을 거부당했다. 제천시는 이 행사에 대해 지원하는 것도 없다.
김학주 사무국장은 “코로나 이전에는 200명 정도 참석했다”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다보니 행사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