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박달재 노래비’ 옆에 ‘제천의병유족회’ 등 2016년 건립반야월, 일제하 '일억총진군', '결전태평양'등 군국주의 노래
묶음기사
- 네모난 인공연못에 둥그런 섬…음성읍 일장기 연못의 비밀
- 친일군수는 일장기연못의 정자를 왜 ‘인풍정’이라고 했을까?
- 영동읍청루! 기생까지 동원해 친일한 악질경찰 최지환을 추모
- 음성군민 혈세로 보전되는 ‘일급친일’ 이무영 생가
-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정지용 생가 앞 돌다리는 황국신민서사비
- 옥천갑부 오윤묵 집터 명치천황 추모비는 누가 만들었을까?
- 일 총독이 극찬…조선 황실 후손으로 일제에 아부한 이태호씨
- 괴산문광면장 송재욱은 미원면 3 1운동 총 쏴 죽인 헌병보조원
- 위안부 공출 강제동원…일제면장이 대한민국의 면장입니까?
- 친일파와 의병의 공존…충주읍성의 자기모순
- ‘악정(惡政)’ 펼친 일제면장 사진 걸어놓고 초대면장 추앙
- 종7위 고등관인데…최고위급 일제간부 기념비인지 조차 몰라
- 태극기는 펄럭였지만…일제면장 공덕비는 우뚝
-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받은 감곡면장 공덕비
- 삼일혁명 당시 도민들은 왜 면사무소를 습격했을까?
- 뽕나무는 죄가 없겠지만…수탈의 잔재, 청주군시제사 공장
- 일제강점기 “독서의 자유를 허하라”며 파업한 청주의 노동자
- 사인암에 새겨진 친일…네 이름 함부로 새기지 마라
- 땅속에 묻혀있다 다시 세워진 일왕등극 기념비석
일억총진군(一億 總進軍)
작사 : 반야월 / 노래 진남방 (반야월의 예명)
나아가자 결전이다 일어나거라
간닌부쿠로(堪忍袋)의 줄은 터졌다
민족의 진군이다 총력전이다
피 뛰는 일억일심(一億一心) 함성을 쳐라
(간닌부쿠로 : 인내를 담은 주머니 / 더 이상 참을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일본식 표현)
싸움터 먼저 나간 황군(皇軍) 장병아
총후(銃後)는 튼튼하다 걱정 마시오
한 사람 한 집안이 모다 결사대
아카이타스키(赤い)에 피가 끓는다
(아카이타스키 : 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사람이 두르는 붉은 어깨띠)
올려라 히노마루(日の丸) 빛나는 국기
우리는 신의 나라 자손이란다
임금께 일사보국(一死報國) 바치는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거리끼겠소
(히노마루 : 일장기)
대동아(大東亞) 재건이다 앞장잡이다
역사는 아름답고 평화는 온다
민족의 대진군아 발을 맞추자
승리다 대일본은 만세 만만세
“올려라 일장기. 빛나는 국기... 앞장잡이다.” 반야월(1917~2012/본명:박정오)이 작사하고 친일노래 ‘일억 총진군’의 가사만 보아도 그가 한때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하다. 자신의 표현대로 누군가의 ‘앞장잡이’다.
작곡가 박시춘과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가요계의 ‘3대 보물’로 평가받는 이가 만들고 불렀다고 믿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1942년 반야월은 ‘일억총진군’외에도 일제의 군국가요인 ‘결전태평양’을 작사했다. 뿐만 아니라 진남방이란 예명으로 ‘조국의 아들-지원병의 노래’와 ‘일억 총진군’을 직접 불렀다. 1943년에는 ‘고원의 십오야’를 노래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그가 작사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유정천리’ , ‘울고 넘는 박달재’ , ‘아빠의 청춘’, ‘무너진 사랑탑’, ‘소양강처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달재에 세워진 친일음악인의 노래비
지난 2016년 3월 19일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 위치한 박달재 고개 정상에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자그마한 안내판 하나가 세워졌다. 안내판의 이름은 ‘가수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행위’다.
안내판을 세운 주체는 제천의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제천·단양지회. 는 지난 19일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노래비 인근에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행위 단죄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민족문제연구소 제천·단양지회 관계자는 “박달재 노래를 통해 전국에 제천의 명소로 알려지게 한 역할은 인정한다. 하지만 친일 행적도 제대로 알려져야만 후세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안내판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이 세운 단죄비에는 반야월의 약력과 그가 남긴 친일가요, 대표적 친일 노래인 ‘일억 총진군’의 가사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사실 이 안내판은 ‘박달재 노래비’가 없으면 이곳에 들어설 이유가 없었다.
반야월은 행방 직후인 1948년 ‘울고 넘는 박달재’의 노랫말을 지었고 이 노래는 큰 반응을 얻었다.
1988년 한 제천의 한 민간봉사단체가 지역을 알린 공로를 인정해 노랫말을 적은 박달재 노래비를 건립했다. 이 단체는 노래비 뒤편에 “인간은 역사화 함께 노래속에서 살아왔다”며 “영원히 애창되고 사랑받는 인기높은 이노래는 국민의 심금을 언제고 울리리라. 충북을 대표하는 우리고장의 노래임을 자랑하면서 노래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뜻을 모아 이돌에 새긴다”고 적었다.
2012년 제천시는 본격적인 반야월 선양사업에 나선다. 2012년부터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백운면 평동리 705번지 일원 1650㎡의 터에 건축면적 200㎡ 규모의 ‘반야월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반야월 작사가의 친일행적이 불거지면서 기념관 건립이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2014년 취임한 이근규 당시 제천시장은 의병의 고장이라는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친일 인사 기념관 건립에 반대입장을 밝혔다.
결국 제천시는 ‘반야월기념관’ 건립 백지화를 선언했고 이미 2013년 건립 공사를 6억여원 낙찰받은 S건설이 반발하고 나섰다. S건설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청주지법은 2016년 9월 5일 제천시가 S건설에 62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화해 권고를 확정했다.
반야월 노래비에 소송건 반야월 유족
그의 친일행적을 생각한다면 설치되지 말았어야 할 반야월 노래비. 하지만 반야월이 작사한 노래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노래비는 뜻밖의 소송에 휘말린다.
지난 2016년 1월 반야월의 유족 일부가 법률대리인을 통해 전국 6곳에 건립된 노래비와 동상이 반야월이 작사한 가사와 제목을 무단으로 사용해 어문저작권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졌다.
위탁대리인 측이 요구한 소송청구액은 총 1억4250만 원으로, 제천시에 소재한 울고넘는박달재노래비에 대해서는 1500만원을 청구했다. 이 외에도 서울 성북구(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서울 금천구·충남 태안군(만리포 사랑 노래비)과 한국수자원공사(소양강 처녀상) 등에는 각각 1500만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반야월의 차남 박인호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셋째누가가 유족들의 동의 없이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나머지 형제들은 이 소송을 원치 않는다고 해명했다.
어쨌든 일부 유족들도 원치 않는 반야월 노래비. 그리고 그 옆에 초라하게 서있는 ‘반야월 친일행적 안내표지판.’
기묘한 동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