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한국에 입국한 이후 9년간 어업 일에 종사
고인 처남·아내 인터뷰…“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사고 원인 아직도 불명확…“사측 빠른 합의 종용했다”

묶음기사

[기획] 우리 곁에 이주노동자가 있다 ⓵

이주노동자 100만 시대. 언제부터인가 이주노동자들은 우리사회 산업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농업현장에서, 건설현장에서 그들은 오늘도 말없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없다면, 산업현장이 멈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도,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내국인의 산재사고가 줄어드는 반면, 외국인들의 산재사고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어찌된 일인지 들리지 않습니다.

충북인뉴스는 다시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 눈물과 웃음을 알리고 이제라도 그들에게 ‘건강한 동행’을 하자고 제안하려 합니다.

 

고 니엔 네고 쿠안(NGUYEN NGOC QUANG) 씨.(유족 제공)
고 니엔 네고 쿠안(NGUYEN NGOC QUANG) 씨.(유족 제공)

 

이름 : NGUYEN NGOC QUANG(쿠안)

국적 : 베트남

나이 : 36세

사망장소 : 오송 파라곤 아파트 공사현장

사망일시 : 2023년 7월 6일 11시 53분

사고종류 : 추락사

 

지난 7월 6일 오송 파라곤 아파트 공사 현장 25층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한 이주노동자 니엔 네고 쿠안(NGUYEN NGOC QUANG) 씨.

위의 정보 이외에 쿠안 씨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사망한지 두 달이 훌쩍 넘었음에도 정확한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그에게 한국생활은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남겨진 유족은 현재 어떤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이미 기억저편으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으니 일단 가족의 입을 빌어서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고인의 처남인 A씨. 그는 현재 경남 창원에 있는 전기전자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남편인 쿠안 씨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9월 14일 쿠안 씨의 처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9월 14일 쿠안 씨의 처남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돈을 벌기 위해 2014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고, 4년 10개월짜리 취업비자를 가지고 시작한 일은 고깃배를 타는 일이었으며, 4년 10개월이 지난 이후에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군산, 여수 등 전국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고 했다.

처남이기 전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타국 땅에서 서로 의지하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쿠안 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너무 불쌍하다고 눈시울을 적신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계속 생각나고 많이 슬픕니다.”

A씨는 특히 쿠안 씨와 함께한 어업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죽도록 고생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며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그가 했던 어업일이란 무슨 일이었을까?

A씨에게서 들은 쿠안 씨의 삶은 충격적이었다. A씨는 어업 일을 한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쳐진다고 했다.

“고기를 잡는 일이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 6시까지 일을 하고 아침식사 후 8시까지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아침 8시에 시작된 일은 밤 12시까지 계속됐어요. 소변이 마려우면 옆에 요강에서 해결했고,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이 없어서 한 모금 빨고 옆 사람에게 주고 그랬어요.”

주 7일, 하루에 무려 18시간을 주말도 없이 꼬박 일하고 받은 월급은 120여만 원.

쿠안 씨도, A씨도,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당장이라도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견딜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에는 자신만 바라보는 처자식이 있었고, 한국에 올 때 진 빚 2000여만 원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업일은 불법체류자 신분에서도 계속됐고, 지난해 오송으로 오면서 비로소 마감할 수가 있었다.

쿠안 씨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겨놓고 모든 돈을 아내에게 보냈다. 한쪽 눈이 실명상태인 아내 레티화(LE THI HOA) 씨는 이 돈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혔다.

“고향에 비해 한국에서 일은 많이 힘들지만 수입은 높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월급날이 되면 남편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겨 두고 나머지를 전부 집으로 보내줬습니다.”

아내가 기억하는 쿠안 씨는 다정다감한 남편, 아이들을 매우 사랑하는 아빠였다. 그래서일까? 그녀 또한 남편이 사망한지 두 달이 지났지만 오늘이라도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만 같아 손에서 전화기를 떼지 못한다. 컴퓨터 화면으로 본 아내의 모습은 남편을 매우 그리워했다. 그녀는 남편이 오늘이라도 살아서 올 것만 같다며 이내 울먹인다.

 

쿠안 씨의 아내 
쿠안 씨의 아내 레티화 씨.

 

유족 제공.
유족 제공.

 

“남편은 아이들하고 매일매일 전화통화를 했어요. 아이들에게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말을 했는데도 아이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아빠한테 언제 전화오냐고 자꾸 물어봐요. 저도 남편이 아직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아요. 믿을 수가 없고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유족들은 아직도 쿠안 씨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알지 못한다. 회사 측에서는 ‘추락’이라고만 전할 뿐, 정확한 사인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측에서 제시한 보상금 1억 5000만원, 회사에서는 합의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보상금이 더 줄어들 수 있다며 빨리 ‘서명’을 해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다.

“회사에서 소송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망보상금 1억 5000만원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한 사람의 목숨이 너무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 두 명이 아직 너무 어리고 이제부터 어린아이 둘을 제가 혼자 키워야 하고 우리 아이들의 교육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정말 보상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현재 쿠안 씨의 아내가 아이들과 살고 있는 지역은 베트남 내에서도 매우 열악한 곳으로 개발계획이 전혀 없는 곳이라고 한다. 일할 만한 곳이 없다는 얘기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앞으로의 삶이,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현실이 두렵다.

현재 쿠안 씨의 보상 문제는 유족 요구에 따라 창원이주민센터와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가 맡아서 하고 있다.

사망 직후 경황이 없던 사이 보상과 관련, 유족들이 베트남 내 브로커 B사와 계약을 했고 이후 이를 취소한다는 의견을 B사에 전달했으나 이미 서류상으로 계약을 한 탓에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특히 중대재해법 위반 여부도 따져봐야 할 문제다.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에 따르면 쿠안 씨는 25층 높이에서 갱폼과 함께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갱폼 조립·해체·인양시에는 크레인에 인양장비를 매다는 등 안전조치를 취한 이후에 작업을 진행해야 하지만 크레인에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정철물을 먼저 해체했고 쿠안 씨는 갱폼이 지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을 하다 추락했다.

일부에서는 내국인도 아니고 외국인, 그것도 불법체류자 신분인데  1억 5000만원이면 괜찮은 보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관계자들에 따르면 사측은 유족들에게 외국인이기 때문에 1억 5000만원도 많은 것이라며 합의를 권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쿠안 씨.

결국 그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주고 떠났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언제까지 방관해야 하는가,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어떻게 보장받아야 하는가, 이주민노동자들의 중대재해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윤종두 창원이주민센터장.
천주교 마산교구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윤종두 창원이주민센터장.

 

이에 대해 윤종두 창원이주민센터장는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부터 잘못 되어있다고 지적했다. 즉 우리나라의 법률에는 모든 권리의 대상을 ‘국민’이라고 명시, 결국 외국인들이나 이주민들은 해당이 안 되어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구조라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노동자, 이주노동자는 국민이 아니에요. 심하게 말하면 권리가 없는 사람, 도구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윤종두 신부의 말은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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