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1908년 3월 8일 미국 수만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빵과 평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한지 올해로 114년이 됐습니다.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노동환경 개선, 여성투표권 쟁취를 간절하게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114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어떨까요? 여성들은 114년 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세계여성의 날 114주년을 맞아 충북인뉴스는 ‘3·8여성의 날 투쟁 충북기획단’에서 보내온 기고 글을 게재합니다.(편집자 주)

 

조장우(평등교육실현을위한충북학부모회 사무국장)

퇴근길,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면서 나는 시간을 자꾸만 보게 된다. 퇴근이 늦은 날이면 마음은 더 급하고, 아이가 많이 기다렸을까봐 걱정을 한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는 제일 먼저 신발장으로 눈이 간다. 남아 있는 신발의 개수를 세며,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남아있는 신발이 적은 날엔 선생님과 아이에게 미안했다. 아내와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맞벌이 부모들이 이런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나마 일하는 동안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고,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보육해주는 돌봄노동자들이 있기에 가능한 날들이었다.

코로나로 어린이집이 휴원에 들어갔을 때, 늦었지만 나는 이 사회가 아이를 길러내는데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더 깊이 생각하고 절실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사람을 돌보고 길러내는 과정이 얼마나 개인의 책임, 특히 여성의 책임으로 내맡겨져 왔는지, 국가와 사회의 역할 방기 속에 돌봄이 얼마나 자본의 이윤중심으로 재편돼 왔는지, 이 속에서 돌봄 제공자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돌봄의 중요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었고, 국가의 역할도 강조되었다. 재난 위기상황에서 돌봄노동을 필수노동으로 치켜세우기도 했지만, 실제 돌봄노동자들의 처우와 노동권에는 무감각했다. 민간시장에 위탁된 채 확대되는 돌봄 영역은 종사자 대다수가 여성 노동자(돌봄노동자 92.5%가 여성, 56.7%가 50대 이상)로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하고 있다. 돌봄일자리의 저평가는 그림자노동으로 여겨져 온 집안의 무급노동에 대한 저평가, 성별화된 고정관념이 사회화된 결과이다. 양육과 간병, 돌봄을 철저히 개인의 몫, 여성의 역할로 치부하는 사회 속에서 돌봄노동이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늘어나는 돌봄 수요를 민간시장에 넘겨버렸고, 재정지원과 소극적 관리·감독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시장화된 돌봄으로 인해 사회서비스의 질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악화되고 있다. 요양보호사, 노인생활지원사, 보육교사, 장애인활동지원사, 아이돌보미, 산모신생아건강관리사, 초등돌봄전담사, 지역아동센터교사 등 110만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은 ‘필수노동자’임에도 초단시간 쪼개기 근무, 공짜 노동, 인권침해 등 법의 사각지대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기간제, 시간제, 또는 시설이나 플랫폼기반 파견노동 등의 불안정한 고용형태로 일하고 있다. 또한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평균 명목임금은 전 산업노동자의 70%에 불과하며, 민간·가정어린이집 보육노동자의 90%는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양기관의 노동자들은 보험수가체계에 맞춰, 활동지원사들은 바우처 수가에 맞춰 급여가 결정된다. 2020년 요양서비스 시장규모는 10조300억 원, 공적 재정이 70% 이상을 차지하지만 국공립 요양시설의 비중은 2.8%에 불과하다. 영·유아 돌봄을 비롯한 아동 돌봄도 정부 재정지원이 대부분이지만, 국공립 어린이집 비율은 20.4%에 그치고 있다.

 

 

돌봄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이 책임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다. 아프면 의료·재활기관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아픈 동료나 가족을 돌보기도 한다. 부모(또는 부양자) 돌봄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으로 성장한다. 이렇듯 돌봄 노동의 본질은 모두가 노동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함께 공유하는 협업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별분업과 위계화룰 통해 돌봄노동의 본질을 왜곡하면서 착취하고 수탈해 왔다. 이 속에서 여성의 노동이 고립되고 권리로부터 배제당하며 불평등하게 살아온 것이다. 이제 돌봄의 본래 의미를 ‘공동체적 협업’으로 되돌려야 한다. 이를 위해선 착취에 동원하는 생산노동시간을 줄이고, 돌봄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와 가정의 형태가 매우 달라진 현실에서 돌봄은 부모나 가정의 책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돌봄을 개별 가정과 민간 업체에 맡기는 방식을 넘어서 국가가 직접 책임져야 한다. 부실한 돌봄 정책의 피해자는 국민 모두이다. 돌봄 받을 권리 보장과 함께 돌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마련해야 하며, 안전한 돌봄을 위해서는 인력, 예산, 공간 등 대한 국가의 체계적 지원과 고민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한 국가의 책무이며, 더 이상 방치하거나 해결을 미룰 수 없다.

이를 위해 공공사회서비스기본법을 제정해 돌봄·보육·가사 등의 공급책임을 공공으로 전환하고, 국가와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한다는 것을 명문화해야 한다. 공급 체제 구축을 위해 ‘전국 읍·면·동에 공공가사돌봄센터’를 만들어 정부와 지자체가 운영하게 하고, 가사·돌봄노동자를 직접 고용해 노동권을 책임져야 한다. 나아가 모든 가사·돌봄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안정된 고용과 충분한 임금, 적정한 노동시간, 차별 없는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경쟁과 이윤이 아닌 연대와 평등에 기초한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자녀 양육뿐만 아니라 노인 요양,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해 누구나 돌봄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는 온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의 돌봄과 재생산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가야 한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를 조건 없이 제공하는 사회를 모두가 바란다. 돌봐야할 어린 아이나 아픈 가족이 있을 때에도 가사와 육아, 간병에 치이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럴 때 돌봄과 보육으로 마음조리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의 걱정도 해결되고, 돌봄노동도 제대로 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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