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군 전역에 500필지, 여의도 절반크기…소작인만 500명 추정
남금자 학예사…당시 소작인 농업생산량 50% 지주가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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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대식(閔大植) 1882~1951)과 민천식(閔天植, ?~1915), 민규식(閔奎植)은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후손이다.

민대식은 민영휘의 다섯째 첩 안유풍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민영휘가 본 부인 사이에 자손이 없자 입양한 민형식이 법적인 장자이므로 민대식은 둘째 아들이 된다.

민천식과 민규식 모두 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에 태어났다.

본보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2년부터 1918년가지 작성한 토지조사부를 조사한 결과 민영휘 아들 3형제는 충북 음성군에서만 최소 154만1925㎡(46만여평)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토지는 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들 일가가 이후 계성주식회사를 통해 토지를 추가 구매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은 음성군 지역에서 더 많은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음성을 분할 한 민 씨 3형제

 

민영휘와 첩 안유풍의 아들 3형제는 음성군 지역 전 읍·면에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충북 음성군 음성읍 8개리에 13만9351평을 소유했다.

 

금왕읍 9개리에 13만9462평을 소유했고 소이면 2개리 6339평, 원남면 3개리에 1만2150평을 보유했다.

맹동면에선 3개리 9233평, 대소면에선 8개리 9만375평을 소유했다. 삼성면 2개리 1만5262평, 생극면 6개리 5만3495평, 감곡면 1개리 1343평을 보유했다.

이들이 보유한 토지의 필지수는 무려 500개에 달했다.

 

민영휘에서 아들로, 조선신탁을 거쳐 손자로 대물림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 아들 3형제는 누구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았을까?

남금자(충주시청) 학예사의 박사논문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사례』를 찾아보면 토지의 기원을 찾을수 있다.

남금자 학예사의 논문은 대한제국 당시 작성된 광무양안 중 ‘충주군 영안’을 바탕으로 저술됐다. 양안은 현재의 토지대장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민영휘는 음성군 금왕읍과 음성읍, 대소면과 맹동면, 생극면과 삼성면, 그리고 감곡면에 233개 필지, 63만여㎡ 토지를 보유했다. 이 시기는 아직 대한제국이 존재할 때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민영휘는 자신이 보유한 토지를 조선총독부가 토지대장을 작성할 때 자신의 이름이 아닌 세 아들 명의로 등기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아들의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는 다시 손자세대로 이전된다.

본보가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일대 토지대장을 전수조사한 결과 민천식 소유였던 토지는 1934년 전후로 민병도(閔丙燾,1916-2006)에게로 이전된다.

민병도는 한국은행장을 지낸 인물로 남이섬의 창립자다. 민대식의 아들이지만 아들이 없던 민천식에게 입양됐다.

민병도에게 넘어간 토지는 다시 1936년을 전후로 민영휘와 민대식이 설립해 운영한 조선신탁주식회사를 거친다. 민병도는 다시 1948년 반민특위 활동이 시작되기전 대부분의 토지를 매각해 부를 축적했다.

 

대지주 민씨 일가는 민중을 얼마나 수탈했을까?

 

1908년 12월 9일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가석하다, 민영휘씨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본분에는 민영휘에 대해 ‘악귀’라고 치지하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기사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민영휘에 대해 “우리는 더 전임 악귀 민영준(민영휘의 개명 전 이름)씨가 아니오. 오늘 날 교육가 민영휘씨라 하였더니...”라고 표현한다.

“전일 민영준씨의 눈에 있는 들보를 모두 빼어 버리고... 옛 민영준씨의 미친 돈병을 모두 고칠지며...”라며 민영휘에 대해 ‘미친 돈병’ 즉 돈에 미친 사람이라고 분석한다.

기사 중간에서 “ 민영준씨의 독한 수단으로 가산을 탕패한 장가, 김가 들이 오늘날 민영휘씨를 방저할 터이며 , 옛날 민영준씨의 악한 입으로 전토를 빼앗긴 박 가, 리 가가 민영휘를 호소할터이니...”라며 민영휘가 강제로 토지와 재산을 빼앗은 사실을 언급했다.

충북 음성군 지역에서도 민영휘에게 강제로 빼앗긴 돈을 돌려달라는 소송도 제기됐다.

이런 사실은 1909년 3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됐다.

민영휘는 이렇게 빼앗은 토지를 소작농에게 농사를 짓게 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남금자(충주시청) 학예사의 박사논문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사례』 논문에 따르면 민영휘는 당시 충주군에 속한 음성군 일대 토지 16만여평에 대하 159명의 소작인에게 대여했다.

남금자 학예사는 소작인 159명 중 59명이 토지가 없는 무전민(無田民)이라고 밝혔다.

남 학예사는 당시 소작인은 종자를 부담하고 농사를 지어 생산한 곡물의 50%를 지주에게 바치는 것이 관행이라고 했다.

농사를 지은 작물의 50%를 챙겼던 민영휘와 후손들에겐 부의 축적 쯤으로 여겨졌겠지만, 농민들에겐 수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 뻔하다.

이렇게 음성군 지역에서 민영휘와 그 후손들의 토지를 소작했며 수탈당했던 소작농은 어느정도일까?

남금자 학예사가 16만 여평에 소작인 159명을 언급한 것을 바탕으로 추정하면 음성군 지역에 480명 정도의 소작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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