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소환 서명부 열람 첫날 60여명 열람…“확인일 뿐” 주장
“군 사업 배제된다”…‘협박’ 전화 걸려와
직접민주주의 위한 주민소환법 한계점 드러나
충북참여연대 좌담회서 “보은군 사례는 헌법소원 감” 지적
주민소환법개정안, 2018년 국무회의 통과됐으나 계류중→폐기

<정상혁 보은군수 주민소환, 왜 무산됐나?>

5월 15일 서명부 열람 첫날, 보은군 선관위 앞에서 열람인들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대화를 하고 있다(사진 제보자 제공)
5월 15일 서명부 열람 첫날, 보은군 선관위 앞에서 열람인들이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대화를 하고 있다(사진 제보자 제공)

 

“다 알고 있더라고. 다 알고 까발린거지! 그 동네 누구누구가 서명했는지 다 알고 있더라니까. 군 사업에서 배제시킨다고 하더라고. 참나~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연락을 했냐고? 서명할 때 주소 이름 주민번호 다 썼거든. 이미 공유가 다 된거지 뭐!”

 

“내 신상 다 털렸다”

주민소환에 서명을 한 보은군 주민 A씨는 지난15일 B씨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통화 요지는 당신이 주민소환 서명란에 사인을 했으니 앞으로 군 사업에서 마을이 배제될 것이고 그것을 책임지겠냐는 것이었다. 순간 억울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항변 한마디 못했다. 전화를 끊은 이후 A씨는 속이 부글부글 끊는다. ‘비공개라고 해서 사인을 한 것인데 어떻게 내 정보가 유출된거지?’ 정상혁 군수는 물론이고 서명을 받아간 청구인도 원망스럽다. 그는 “앞으로는 이런 일에 절대 참여하고 싶지 않다. 신상이 다 털렸다. 기자한테 이런 전화를 받는 것도 너무 싫다”며 “전화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자기만 ‘등신’이 됐다고도 했다. 반면 B씨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 그런 전화를 한 적도 없다며 중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일은 현재 보은군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8월 정상혁 군수의 친일발언 이후 ‘옹호’ 측과 ‘반대’ 측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고 주민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조차 꺼려한다. 자신의 서명으로 마을이 군 사업에서 배제될까 두렵기도 하다. 시민이 지자체의 정책까지 직접 결정한다는 21세기 대한민국 보은군에서 일어난 일이다.

 

서명도 안했는데 서명 제대로 됐나 확인한다고?

운동본부는 15일 철회를 선언했다.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정상혁보은군수주민소환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름만 대면 개인 신상이 모두 드러나는 작은 보은군에서 3선 군수에게 서명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살생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며 “서명한 주민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 뻔하고 그들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어렵게 주민소환 철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상혁 군수 측근들과 일부 단체장, 이장, 지역의 유력인사들이 선관위에서 장사진을 치고, 지역별로 누가 서명했는지 취합하고 색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참담한 광경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실제 15일 선관위에서 서명부를 열람한 사람은 60여명에 달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한 8시간동안 꼬박 열람이 이뤄졌다. 4명씩 들어가 읍·면별로 구분된 서명부를 확인했다. 1인당 30분이니 외우기 수월했다. 오황균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상임대표(내북면 주민)는 “열람 첫날 선관위에 가니까 서명부에 사인도 하지 않은 이장들, 체육회장, 전직공무원 등 수십명이 선관위 현관 앞에 죽 있더라고. 보고 나온 사람들이 ○○면에는 몇 명이냐, 누구냐, ○○는 사인 안했다더니 서명란이 있네 등등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직접 들었다. 명단을 수첩에 적기도 했다”고 전했다. 운동본부가 주장하는 ‘조직적인 색출작업’이 실제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상혁 보은군수의 주민소환은 없던 일이 됐다. 운동본부는 서명을 해준 이들이 실제 협박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민소환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물론 당초 보은군 선관위는 열람은 서명에 참여한 군민을 대상으로만 이뤄지며 서명이 적절하게 이뤄졌는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열람대상은 보은군 군민 전체가 되었고 서명을 하지 않은 이들도 읍면별로 잘 정리된 서명부를 30분 동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선관위 한 관계자는 “주민소환법에 따라 진행된 것일 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또 정 군수 주민소환을 반대하는 ‘범군민 주민소환반대추진위원회’ 측은 열람과 관련해 운동본부와 다른 주장을 한다. 한 관계자는 “서명부를 열람한 이유는 내가 사인을 하지 않았는데도 사인이 됐다는 소문이 많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열람했다. 부정서명과 관련된 증거는 공개할 수 없지만 많다”라고 강조했다. 또 “서명을 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지난 21일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주민참여제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긴급좌담회를 열었다.
지난 21일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주민참여제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긴급좌담회를 열었다.

 

참여연대 좌담회, 정 군수 주민소환 집중 다뤄

지난 21일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가 연 긴급 좌담회에서는 서명부 열람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주민참여제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서 청주대 법학과 조한상 교수는 “열람은 주민소환법이 아니라 주민투표법에 근거한다. 기본권으로 본다면 위헌이다”라며 “입법자의 치명적인 실수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충북참여연대 강태재 상임고문은 "보은선관위의 명단 공개는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다. 편법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져야 할 일이다. 보은군에서 일어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런 것 때문에 소환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또 정의당 김종대 의원 이재표 보좌관은 “본인 것만 열람하면 되지 다른 사람 것을 왜 열람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특히 30분이나 시간을 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보은선관위는 법 규정상 열람과 정 군수의 서명부 정보공개청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정상혁 보은군수의 친일발언에 대해 사과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보은지역 시민사회단체 회원들.
정상혁보은군수주민소환운동본부 홍승면 집행위원장이 지난 15일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주민소환 철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상혁보은군수주민소환운동본부 홍승면 집행위원장이 지난 15일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주민소환 철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너무 어려운 주민소환

운동본부가 정상혁 보은군수의 주민소환을 철회한 이유는 주민이 받게 될 ‘협박’ 이외에도 무효서명이 예상보다 많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투표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게 되었고 투표로 이어진다 해도 실제 주민소환이 성사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운동본부에 따르면 서명부 4671명 중 무효서명은 306표다. 주민투표를 할 수 있는 서명요건 4415명에서 50명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운동본부 한 관계자는 “당초 무효서명은 200명 미만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생년월일 주소 등 숫자가 하나라도 잘못되면 모두 무효로 인정됐다. 연령이 높으신 어르신들이 주로 서명을 하다보니 실수가 많았던 것 같다”라며 “주민소환 요건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명부인원을 채우는 것도 그렇고, 투표율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투표율이다. 투표가 진행됐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주민소환을 하기에는 매우 어렵다는 얘기다. 주민소환법이 도입된 2007년부터 현재까지 100건이 넘는 주민소환운동이 펼쳐졌지만 실제 소환된 이는 단 2명에 불과하다.

주민소환투표는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종의 보궐선거로 분류된다. 보통 보궐선거 투표율은 40%미만이다. 2000년 이후 실시된 35번의 보궐선거에서 절반이 넘는 21번은 투표율이 40%미만이었다.

주민소환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33.3%가 투표에 참여해야 하고 그중에서 50%가 찬성해야 한다. 언뜻 보궐선거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제 국회의원이나 기초단체 보궐선거와 주민소환투표는 많이 다르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서명부 청구인 대표였던 서성수 씨는 “보궐은 A, B, C 등 여러 후보들이 나오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 투표를 한다. 그래도 40%가 안 된다. 그러나 주민소환투표는 한명에 대해서만 투표를 하는 것이다. 주민소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아예 투표를 안한다”라며 “다른 보궐과 비교했을 때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정상호 서원대 사회교육과 교수가 좌담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정상호 서원대 사회교육과 교수가 좌담회에서 발제를 하고 있다.

 

21일 열린 좌담회에서도 이 문제는 지적됐다. 정상호 서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주민소환은 탄핵과는 다르다. 일종의 정책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활성화시키기 위해 주민소환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개표가 되기 위해 33.3%가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은 헌법소원을 제기해도 될만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한편 주민소환 청구요건을 완화한다는 '주민소환법 일부 개정안'은 지난 2018년 12월 국무회의에서 통과됐었다. 당시 개정안은 청구요건 완화, 개표요건(투표율 3분의 1미만이면 개봉 안함) 폐지, 투표 대상 확대, 전자서명 허용 등 주민참여의 제도적 틀을 획기적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러나 상임위에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본회의도 거치지 못한 채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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