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두어 차례 내리고 나니 올려다 볼 꽃이 없다. 덩그러니 남은 자줏빛 꽃술이 얼마 남지 않은 봄의 아쉬움을 하늘에 그려 놓은 듯하다. 꽃 진 자리 곁을 연초록의 이파리가 차지하고 있다. 며칠 내리 불어대는 바람에 여린 이파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가지마다 부딪는다. 이제 봄을 놓아 주어야 하나. 시샘하는 바람이 야속하고 이파리의 몸부림이 안쓰럽다.

떨어진 이파리는 거리를 수놓았다. 오가는 발걸음에 파릇한 봄이 꾹꾹 눌려 있다. 가장 생기 넘치던 제 시절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모양일까. 아지랑이처럼 흐드러진 문양을 따라 걸어 본다. 사나운 바람이 비껴가기라도 했는지, 저 멀리 점점이 꽃등 밝힌 나무가 서 있다. 희미한 꽃등 아래 노점 상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딸기 두 상자 고르면 한 상자는 덤으로 준단다. 끝물 딸기라 떨이인가 보다. 들쑥날쑥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으로 볼품은 없지만 상큼하게 번지는 향은 실한 딸기 못지않다. 욕심은 난다만 세 상자나 무엇 하나. 눈치 빠른 상인은 잼을 해 두면 초여름까지 요긴히 먹을 수 있다고 넌지시 귀띔한다. 끝물 딸기로 만든 딸기잼이라, 오래된 추억에 혀끝이 간질거린다.

유년의 봄이면 먹성이 돋는 것인지 식탐이 이는 것인지 종일 배가 고팠다. 왜 아니겠는가. 봄물 소리에 맞춰 돌다리를 건너고 꽃길 따라 뛰어다니느라 아침밥 잔뜩 먹고도 얼마 안 가 배는 쉬이 꺼졌다. 길어진 해를 알뜰하게 쓰다보면 입에 고인 침마저 달았다. 종일 밥 때만 기다렸다는 말이 맞을지 싶다. 밥투정이 무엇이었겠는가. 흰밥에 김치만 얹어 먹어도 뽀얗게 살이 올랐으니 말이다.

요즘처럼 꽃샘바람 불 때면 그 시절 엄마는 딸기잼을 만들었다. 밥투정 모르고 컸다지만 내 입에 당기는 것이라고 왜 없었겠는가. 제철 과일 풍족히 먹일 형편은 못 했을지라, 엄마는 끝물 딸기라도 한 솥 끓여 두고 심심한 자식 입에 넣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엄마라는 이름이 붙어서일까, 천진한 얼굴을 들여다보는 애잔하고 애틋한 마음의 깊이를 이제는 가늠해 보게 된다.

크고 실한 것 없이 자잘한 딸기를 덩어리 채로 연탄불에 올리면 잼 만들기가 시작된다. 엄마에게 정확한 레시피나 있었을까. 엄마는 ‘알맞게’ 설탕을 쏟아 붓고 ‘적당히’ 졸여 내면 딸기잼은 저절로 맛있어 진다고 하셨다. 엄마가 엄마로 살아 온 세월이 알려준 계량법, 마음을 다한 조리법이면 충분하다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딸기가 지닌 제 맛이 은근히 살아나게 졸여내는 방법은 엄마만의 비법이라면 비법이었을 것이다. 덩어리째 씹히는 쫀득한 딸기의 식감이 아직도 입안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믹서에 갈아 설탕물에 우르르 끓인 달고 끈끈한 시판용 제품과 어떻게 비교 할 수 있을까.

코끝에 침이라도 발라가며 기다릴 것을.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르고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딸기가 잼이 되는 과정을 구경하곤 했다. 뱃속에 며칠 굶은 개구리라도 들어앉았는지 자꾸만 ‘꾸룩꾸룩’하는 소리만 성가실 뿐, 조바심도 싫증도 나지 않았다. 설탕이 녹으면서 딸기에 스며든다, 말캉하게 익어가는 딸기는 분홍빛 거품을 내뿜는다. 냄비에 수북하던 딸기가 서서히 가라앉을수록 붉은색은 진해진다. 진득하게 점성이 생기면서 잼은 반질반질 윤이 난다. 설렘과 기대로 새겨진 기억은 수십 번의 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장면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꼬리가 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서둘러 노점 상인에게 딸기 값을 치루라며 채근하는 듯하다. 잊고 있던 생기어린 유년 시절과 젊은 엄마의 모습을 흔들어 깨워주었으니 목이 쉰 바람 소리도 밉게 들리지 않는다. 양 팔로 감싸 안은 딸기 상자에서 봄볕처럼 가볍고 봄꽃처럼 은은한 향이 번진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달콤한 첫맛이 행복한 끝맛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딸기잼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알맞게’ 설탕 넣어, ‘적당히’ 졸여지면 친정 엄마도 맛 좀 보여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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