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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은
  • 승인 2020.10.2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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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기별 없이 찾아온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해 보였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가을을 절감하게 하였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이데 온 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때면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뜨거운 부피로 시린 속을 일어나게 해 줄 차 한 잔이 절실해진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자칫하면 누워버릴 시간이었다. 시장에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북적이는 시장 통은 전에 없이 한산하였다. 인도의 가장자리는 노점상마저 이가 빠진 듯 드문드문 줄이 끊어져 있었다. 듣기 좋은 상인들의 목청도 물건을 고르는 구경꾼들의 소란함도 꺼져버린 시장은 인심마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언제쯤 예전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는지. 삭막한 기운에 발걸음이 편치 않았다.

생강 파는 노점을 찾아 한참을 헤맸다. 한산한 길 끝으로 하늘에 펴 받칠 것도 없이 장사하는 노인이 보였다. 볕조차 비껴가는 구석자리에 바람이 어찌나 왔다갔는지, 노인이 기댄 나무는 졸가리만 앙상하였다. 졸가리는 축 늘어진 전봇대 전선 같은 그림자를 노인의 머리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맨바닥에 찬기를 깔고 앉은 탓인지 얼어붙은 모양으로 꼼짝하지 않았다. 바짝 세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노인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휘주근한 모습의 노인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듯 진열해 놓은 마늘이며 생강은 무척 알차보였다. 머리채를 단단히 묶어 똬리를 틀어 놓은 마늘은 들어찬 알맹이로 미어질 것 같았다. 방파제의 둑처럼 쌓아 올린 생강에서는 코를 호강하게 하는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생강을 살피느라 쪼그리고 앉는 나를 보고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냐는 물음에 노인은 뭐 하려는지 되레 묻는다. 끓여 마실 요량인 나에게 요긴한 연륜의 비법을 알려주고 싶었는가 보다. 생강 담는 봉지를 펼쳐 든 손이 오래된 부뚜막을 지키는 솥단지처럼 검고 여러 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씨알 굵은 생강을 골라 담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늘고 질겨 보이는 손은 무척 컸다. 눈썰미 없는 손님의 눈대중으로도 중량은 초과였다.

“가져가, 나는 더 주려고 파는 거야.”

염치 없어하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다 식은 무릎 사이로 파고드는 노인의 얼굴에서 겸연쩍어하는 미소를 보았다. 속 깊은 덤의 고갱이인양 하얀 미소였다.

밤이 어느새 길어졌다. 소란한 일상이 잠든 틈에 노인의 푸근한 마음을 풀어 정성껏 씻고 다듬는다. 끓기 시작한 주전자는 도르륵 도르륵 밝은 소음을 낸다. 열기가 띄워 올리는 생강들이 서로 부딪치며 맛과 향을 내는 소리일 것이다. 주둥이로 빠져나온 희뿌연 김이 생각의 도화지로 펼쳐진다. 줄기와 가지만으로 우뚝 서 있는 나무 곁에 시간의 흠결만큼 거칠고, 떨어지는 세월처럼 앙상한 노인의 모습이 정물로 그려진다. 정적이고 많은 여백을 담은 그림은 한층 깊고 너그러운 느낌이다. 자신의 그릇에서 기꺼이 더 내어주고 마음까지 얹어주면서 흥정을 하지도 생색을 내지도 않는 도타운 덤의 색깔로 채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서 향이 배어 나온다. 온 몸 구석구석으로 온기를 전하는 진한 덤의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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