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있다. 거실은 그림자로 얼룩덜룩하다. 집안 깊숙하게 들어왔던 빛이 뒷걸음질 치는 중인가 보다. 잠시 쉬어가는 빛에 베란다는 작은 온실처럼 느껴진다. 창을 통해 드리워진 빛은 바닥에 뽀얀 방석 한 장을 그려 놓는다. 밀어 두었던 일을 꺼내고 싶게 하는 안온한 방석이다.

나는 신문지 한 장을 펼치고 며칠 전 사다 놓은 멸치 상자를 쏟아 놓는다. 검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적당히 구부러진 몸통들이 얽히고설켜있다. 무너지지 않고 쌓인 더미가 제법 높다. 살집 있는 멸치는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비늘이 덮인 채다. 입맛 당기는 짭짤한 냄새 끝에 묻어나는 비릿함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보기 좋은 멸치 덕인지, 멸치를 사던 그 날의 운 덕인지는 모르지만, 저녁에는 뜨끈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뿌연 빛을 마주하고 앉는다. 세운 두 무릎에 얼굴을 기대면 목덜미가 따뜻하다.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온기가 전해진다. 벌려 놓은 일이 수월해질 듯싶다. 멸치 머리를 살살 비틀어 떼어내면 몸통의 가시도 딸려 나온다. 납작한 두 편으로 가르기 위해 멸치의 굽은 등을 엄지와 검지로 자근자근 누른다. 한쪽 편에 붙은 내장까지 빼내야 손질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하나, 둘 매만질수록 일머리가 잡힌다. 손끝이 여물어지는 느낌이랄까. 쪼그리고 앉아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생각이 골똘해진다. 잔 불씨가 반짝이는 아궁이 앞에 앉아 멍하니 시린 손을 쪼이는 기분이다.

입추를 알리기 무섭게 오한을 달고 살았던 기억이다. 절기상 가을이라는 것뿐이지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뭐 뜨끈한 국물 없을까.’

높아진 하늘에 고개가 젖혀지거나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에 귀가 예민해지면 의례 혼잣말처럼 새어나오는 말이었다. 김 오르는 국물 한 사발이 무어라고 그리 간절했을까. 입이 찾는다기보다 속에서 당긴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살다보면 실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마음에 얹어지고 있는 듯 불확실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별 것 아니던 일이 별 일이 되고 건성으로 대하던 큰일들이 모른 척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때 말이다. 바뀌는 계절에 나이를 먹듯 마음도 저절로 넉넉해지면 좋으련만. 들쭉날쭉 늘어가는 삶의 책임은 언제부터인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려놓을 수 없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삐딱한 시렁마냥 균형이 맞춰지지 않는 마음은 순간순간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여름 끝자락과 가을 초입의 일교차가 얼마나 고약한지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만큼 어중간한 삶의 몸살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바람 새는 틈을 막고 긴 옷을 입다 못해 속을 덥힐 국물을 찾던 무의식적인 행동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느닷없는 한기에 몸이 곤곤해졌기 때문만은 아니겠지. 그것이 삶의 계절갈이를 앓는 마음이 ‘쿨럭’대는 소리임을 나는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다.

삶의 환절기를 떠올리면 적요해진다.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연속되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건너 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불안함에 신열이 나기도 하고 속이 부글거릴 때면 울적하기도 하였다. 꼬이고 어긋나는 마음 때문에 서글펐던 기억도 있다. 잠시 멈춰서 기다릴 줄을 몰랐다. 우르르 끓인 속은 넘치기만 할 뿐, 삶을 깊어지게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어차피 앓고 지나가야 한다면 메마른 감정들을 정성껏 다듬어 보리라.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 시간을 들이다 보면 말하지 못해 꽉 막혔던 것들이 진득한 속을 우려낼 것이다. 마음이 계절갈이로 어수선 할 때면 시간을 설설 끓여보는 방법도 나이 드는 요령이라는 것을 중년의 길목에서야 알게 되었다.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에서 바글바글 속 끓는 소리가 흩어진다. 커다란 냄비 안에 가득했던 물이 엄지손가락 깊이만큼 줄어들었다. 거무스름하던 멸치가 맑은 회색으로 떠오른다. 구수하고 짭조름한 맛을 뱉어내느라 멸치가 애를 쓰는 모양이다. 다시마 몇 조각, 무 반 토막, 양파 한 알, 대파 두 뿌리도 자연스러운 짠 맛과 수다스러운 단 맛을 보탰을 것이다. 황금색에 푸른빛이 도는 국물을 한 숟갈 맛본다. 짠 맛이 소리를 높이면 단 맛이 뒤로 슬그머니 달라붙어 균형을 이루는 수더분한 맛이 난다. 호박 고명 올린 삶은 국수에 푹 잠기도록 국물을 부어주면 소박하지만 속 끝까지 뜨끈한 잔치 국수가 될 것이다.

해 넘어간 하늘에 어느새 새들이 음표를 그리며 날아간다. 제 둥지를 찾아 가는 길인가 보다. 어둠을 밀어 올린 가로등은 은행잎처럼 피어 길을 밝히고 섰다. 그 한가운데로 시린 계절이 서성거린다. 서둘러 국수를 삶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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