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광무황제(고종)가 강제로 퇴위당한다. 일제와 임선준, 이완용 등 친일파들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 보재 이상설 선생을 정사로 해 파견한 특사를 빌미 삼았다.
7월 24일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정미7조약은 입법·행정(2조)·사법(3조)·관리임명(5조) 등 통치권 전반에 걸친 탈취하는 내용이 담겼다. 1905년에 강제체결된 을사늑약을 한층 강화해 대한제국의 나머지 주권마저 박탈하는 조약이었다.
정미7조약은 핵심은 대한제국의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해산하는 것이였다. 일제는 <부수각서>를 통해 군대해산의 방법과 해산군인의 사후처리 문제를 세밀히 규정했다.
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일주일이 지난 8월 1일부터 대한제국 군대에 대한 무장해제가 강제됐다. 해산 대상이 된 대한제국의 정규군은 7000명 수준이였다.
의병전쟁의 시작과 충주
정미조약을 근거로 1907년 8월,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나섰다.
일제의 이런 행위는 대한제국 군인들을 중심으로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다.
정규군인 출신이 합세하면서 의병 항쟁은 과거 보지 못한 영역과 규모로 확대됐다. 1907년 말까지 전황은 거의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1908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북쪽 간도·노령·연해주에 지방에서 남쪽 제주 까지 저항은 확돼됐다.
일제의 침탈에 맞서 의병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07년 8월초 충북·강원‧경북 등 각도의 의병이 먼저 봉기했다. 격문이 나붙으면 민중이 결집해 함성을 울리며 경찰서 관아,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방화했다.
전국으로 확돼된 전선없는 의변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평화롭던 농촌마을이 일본군의 방화로 마을 전체가 초토화됐다. 양민에 대한 학살도 이뤄졌다.
충북 충주시와 제천시는 의병전쟁의 중심지였다.
1907년 8월 3일 밤 충북 청풍의병은 청풍읍 경무분파소를 습격했다. 의병은 양총 3정과 순검모, 군도, 제복을 노획했다.
8월 7일에는 충주 중원(경찰)분파소를 습격했다.
충주와 제천, 강원 원주 등을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 사령관은 8월 6일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으로 하여금 보병 2중대를 원주에 급파했다.
1907년 8월 15일 충북 체천에 의병부대가 일본군 1소대를 포위 습격했다. 일본군은 의병의 기습공격을 피해 간신히 탈출했다. 제천 일대는 완전히 의병 천하가 됐다.
8월 16일 의병은 장호원(당시 행정구역은 충주)에 주둔한 일본군 충주수비대를 급습해 2명을 사살했다.
이에 놀란 일본군 사령관은 고립상태에 빠진 충주와 원주의 일본군을 구출하기 위해 또 다른 1개 소대를 증파했다. 하지만 들불처럼 번진 의병전쟁을 막기는 역부족이였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는 중대병력이나 소대병력의 동원으로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우선 충주에 대대병력을 급파했다. 서울 주둔기병(제17연대)과 보병(제51연대·52연대)으로 구성된 대대병력을 차출해 8월 18일 철도편으로 조치원까지 수송해, 다시 도보로 충주로 행군하게 했다.
대대병력으로 증강된 일본군 충주수비대의 일부가 1907년 8월 23일 청풍·제천으로 진입했다. 온 마을을 방화해 초토화시켰다.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야만적인 방화와 민간인 살육을 통한 응징적 토벌이었다.
이에 맞서 의병은 같은 날 충주를 포위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자랑스런 의병의 고장 충주
충주는 신라시대부터 ‘중원경’이라 불리며 충청도의 수부도시의 위상을 가지고 있던 곳이다.
1908년까지 충청북도의 관찰사가 있던 수부도시였다.
충주 시내에 소재한 관아공원엔 조선시대 충주목 동헌으로 쓰던 청령현과 제금당 등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곳을 둘러쌓던 충주읍성은 지금은 허물어져 남아있지 않다.
충주 관아공원에 들어가면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을미의병과 충주성 전투’를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충주성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노해 1895년 일어선 을미의병 유인석 대장이 일본군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 곳이다.
유인석이 이끌던 ‘호좌의진’ 부대는 1896년 2월 17일 충주성의 점령한다. 이날 유인석 대장이 이끈 주력부대는 충북 제천시 박달재를 넘어 일본군과 관군이 지키던 충주성을 공격한다.
유인석의 부대는 농민들을 포함해 그 규모가 1만명을 넘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의병의 공격에 놀라 달아났다.
유인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을 끌어들인 죄를 물어 당시 충주부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한다.
이후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퇴각했지만 유인석의 부대가 충주성을 장악했던 일군을 물리치고 관찰사를 처단한 것에 대해 친일관료들은 두려움에 빠졌다.
충주시는 이런 역사를 살려 이곳에 을미의병을 알리는 안내판까지 세웠다.
그런데 이곳 관아공원에 또 하나의 공덕비가 눈에 띈다. 비석의 명칭은 ‘서회보 애민선정비’다.
의병의 중심고장서 귀순공작에 앞장선 조선총독부 충주군수 서회보
서회보(徐晦輔, 1849~1919)는 어떤 인물일까?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기 전에는 대한제국의 관료였다. 1906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의 영동군수를 역임했다.
정미7조약이 체결된 해인 1907년 12월 31일 충주군수에 임명됐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제 조선총독부는 1910년 서회보를 충주군수로 재임명한다.
서회보는 이를 마다하지 않고 1917년 1월 29일까지 군수직을 유지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915년에는 다이쇼 일왕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는다.
1917년부터 1919년 사이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찬의에 올랐다.
당시 그가 받았던 연 수당은 600원인데, 그때 쌀 한가마니 가격은 1원50전 정도였다. 이를 현재 쌀 한가마니 가격(80㎏=20만원)으로 환산하면 연수당 8000만원이 된다.
70대 나이에도 연 수당으로만 1억 가까이 받은 셈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서회보가 충주군수로 부임한 1907년은 정미7조약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시작됐던 시기다.
서회보는 일제 앞잡이였던 정미7적 임선준, 송병준 함께 의병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1907년 12월 당시 일제는 송병준, 임선준을 앞세워 “지방의 의병으로 앞으로도 계속하여 ‘소요’하는 자는 법에 의하여 처벌하되 성심으로 귀순하는 자는 전죄를 불문하고 안도 악업케 할 것”이라는 칙령을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뒤에서는 지주등을 밀정으로 포섭하고 의병내부에 대한 적극적인 공작을 펼친다. 일진회를 전투부대로 앞세워 직접 의병부대를 공격하고, 의병내부를 와해시키는 치밀한 귀순공작을 주도면밀하게 시행한다.
의병을 이탈해 관군에 투항한 이들을 ‘귀순자’라고 호칭하고 이들로부터 의병내부의 정보를 캐내 의병을 탄압하는데 이용한다.
서회보는 이에 성실하게 응한다
서회보의 의병 귀순공작에 대한 행적은 정미칠적 임선준과 송병준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먼저 서회보는 임선준과 송병준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의병들을 ‘폭도’(暴徒) 혹은 ‘도당’(徒黨)이라고 호칭한다.
이 단어 앞에 ‘오입’(誤入)이란 단어를 붙여 ‘오입도당(誤入暴徒)’, ‘오입폭도(誤入暴徒)’라 표기했다.
서회보가 귀순공작에 성공해 보고한 의병수만 159명에 달한다. 이들은 주로 충주와 제천, 청주와 원주 등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충주의 상징, 충주읍성을 허물고 도청을 청주로 내주다.
1912년 서희보는 충주군수로 있으면서 ‘시구개정’이라는 것을 통해 본격적으로 충주성을 허무는 작업을 시작한다.
1913년 9월 14일 매일신보 <충주의 시구개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충청북도 충주는 원래 관찰도 소재지로 충북 북부의 경제적 중심지인데 지금 공사중인 청주로 통하는 2등도로는 곧 완공되겠고 또 서울로 통할 1등 국도도 곧 개통될 터인즉 개통하는 날에는 상당히 번영할 것이나 시가는 뒤섞이어 어지러운 구시가인즉 이번에 북문으로 부터 남문에 통하는 도로를 간선으로 하여 북문에서 남문까지 폭 7.2미터의 간선도로를 놓고, 이 7.2미터 도로 11개, 4.3km 및 폭 5.4미터 도로 3개 1.2km의 도로를 건설함에 지방비의 보조를 얻어 정연한 시가를 조성할 계획서를 당국에 제출하였다”고 보도한다.
결국 충주읍성은 깨지고 또 깨지고 산산이 부서져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졌다.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청주로 이전한 시기도 서회보가 군수로 재직하던 때였다.
1908년 일제가 사실상 장악한 대한제국은 칙령을 발표해 충주에 있던 관찰부를 청주로 옮겼다. 충청도 1000년 중심이였던 충주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충주에서 청주로 도청소재지가 옮기게 된 데에는 충주지역의 의병전쟁도 빌미가 됐다.
1923년에 작성된 '청주연혁지(淸州沿革誌)'에 따르면 충북관찰부 일본인 서기관 카미타니 다카오(神谷卓男)는 통감부에 관찰부와 관련한 의견서를 보냈다.
카미타니는 의견서에서 조치원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청주가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가장 적당한 곳이고, 주변이 산악으로 둘러싸인 충주는 반란군(의병전쟁)의 근거지가 됐던 점 등을 들어 도청 이전을 제기했다.
뒤늦게 세워진 ‘서회보 단죄 안내판’
충주관아공원에는 여전히 서회보의 애민선정비가 남아있다. 의병을 탄압하고, 충주성을 허무는데 앞장섰던 서회보에 대한 공적비가 충주성 중심부에 남아있는 웃지 못할 상황.
다행히 2년 전 서회보 공적비 옆에 그의 죄상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2023년 3월 1일 충주3‧1운동기념사업회(대표 전흥식 박사)는 선정비 옆에 ‘친일매국노 서회보’란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들은 ‘친일매국노 서회보’로 시작하는 안내판에서 “서회보는 의병탄압에 앞장섰고, 시구개정등 식민지배정책에 적극 협력했다”며 그의 죄상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2023년 3‧1절을 맞아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단죄문을 세운다”고 적었다.
같은 해 충주시도 ‘서회보 애민선정비’에 대한 안내판을 설치했다. 여기에는 그의 행적과 함께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5인‘에 포함됐다”고 짤막하게 설명글을 달았다.
아들과 손자는 독립운동
역사의 아이러니 일까? 서회보가 의병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일제에 아부해 중추원부찬의까지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그의 후손들은 독립운동에 나섰다.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은 서회보의 둘째아들 서천순(徐千淳·1901~1964), 손자 서상경(徐相庚·1900~1962, 서회보 장남 서중순의 아들,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이다.
서천순은 1919년 청주농업학교 재학시절 일제에 의해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상경은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 아나키즘을 중심사상으로 받아들였다.
청주농업학교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 300장을 등사해 배포했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5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동감해,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했다.
1923년 5월 도쿄에서 박열(朴烈)과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일본에서 귀국해서는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1월 서정기(徐廷虁)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했다. 또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5년 11월 징역 1년형을 얻도 받았다.
1929년 2월 권오순(權五淳)·안동규(安東奎)·김학원(金學元)·정진복(鄭鎭福)·서정기·김현국(金顯國)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문예운동사(文藝運動社)라는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했다.
문예운동사 사건으로 다시 5년간 구속됐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한편 충주지역 신문인 <충주신문>은 2023년 4월 1일자 기사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 속편‘에서 서회보가 관직에 오른 배경을 설명한다.
<충주신문>은 기사에서 서회보의 증손자의 전화통화 내역을 전한다. <충주신문>은 “(증손자가 말하기를) 서회보는 예산 지역에서 화랑(畵廊)을 경영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그런 화랑을 이야기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중에 그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는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다고 한다. 또한 서회보는 기공(氣功)을 수련했다고 하는데, 그에게 기공을 배운 일본인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와 인연에 의해 1905년 영동군수로 발탁된 것이고, 그 연장으로 1908년 충주군수로 이임해 1917년까지 있었던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서회보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정지리에 있다.
이곳에 후손들이 충주시 신니면에 있던 서회보 선정비를 옮겨 놨다. <충주신문>은 증손자가 “서회보 선정비가 있던 원 위치인 충주시 신니면에 옮길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만약 이 비가 원위치로 돌아온다고 하면, 충주에 때아닌 친일논쟁이 불붙을 것이 예상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