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친일청산‧재산환수 마적단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 후손, 민영휘 차명재산 추정 토지에 줄소송 소송 통해 공시지가 17억 토지 찾아가고, 연간 수천만원 점용료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는 친일파 민영휘의 손자 남이섬 주주 출신 민병도 아들 2명 소송참여…딸도 소송참여

비난은 잠시뿐…친일조상 땅찾기 나선 ‘남이섬’ 설립자 후손들

2025. 09. 22 by 김남균 기자
민영휘의 차명으로 신탁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에 대해 ‘조상땅 찾기’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인물들이 국민관광지로 ‘남이섬’과 관련된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민영휘의 차명으로 신탁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에 대해 ‘조상땅 찾기’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인물들이 국민관광지로 ‘남이섬’과 관련된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300만명이 찾는 다는 국민관광지 남이섬과 민영휘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가 차명으로 신탁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지에 대해 ‘조상땅 찾기’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인물들이 국민관광지로 ‘남이섬’과 관련된 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閔丙燾, 1916~2006)씨의 아들 민□기씨와 민△기씨, 딸 민○기씨는 2020년 이후 민천식(閔天植. ?~1915)이 사정받았던 토지 여러필지에 대해 정부와 지자체를 상대로 ‘조상땅찾기’ 소송에 나섰다.

대한민국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를 상대로 한 것이었는데, 이들은 민천식 소유의 토지를 상속자인 후손의 동의없이 국가가 임으로 등기를 한 것은 무효이므로, 등기를 말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또 지자체와 국가를 상대로, 이 토지에 대한 점용료(부당이득금)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송을 통해 민천식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최초 사정받았던 총 16개 필지(9813㎡, 공시지가 16억5870만여원)를 되찾아갔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부와 남양주시 등 지자체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이를 통해 민병도의 후소손들은 광주시와 남양주시를 상대로 연간 3000만원 가까운 점용료까지 받아가게 됐다.

민영휘와 민천식, 민병도는 무슨 관계?

 

민영휘(민영휘(閔泳徽, 1852~1935)는 정실 부인과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자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을 양자로 입양했다.

민영휘는 정실부인 외에도 여러명의 첩을 두었는데, 그중 한명인 안유풍과의 사이에서 아들 세명을 낳는다.

민대식(閔大植. 1882~1951), 민천식, 민규식(민규식(閔奎植, 1888~?)이 바로 그들이다.

민천식은 1915년 자손을 얻지 못한 채 30대 안팎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러자 민천식의 부인 이민천은 민대식의 차남 민병도를 ‘사후 입적’했다.

이후 민병도는 민천식 명의의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는 어느정도 재산을 물려받았을까?

1936년 6월 1일 발행된 잡지 『삼천리』는 ‘1200만원이라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 기사에서 민천식이 물려받은 유산에 대해 언급한다.

『삼천리』는 기사에서 “(민영휘)씨가 생존할 시에 대체의 분배는 정하여 있었다 한다”며 “ 대체 윤곽을 보면, 민대식씨가 제일 거대한 분배를 받고, 그 다음이 민규식, 또 그 다음이 민천식(死亡)”이라고 밝혔다.

세부적으론 “천식(미망인이 관리)씨가 4만석의 토지와 수 만원의 현금을 가졌다”고 밝혔다.

취재진이 확인한 것에 따르면 1910년부터 1913년 사이에 조사된 조선총독부 토지조사부에서 민천식은 충북지역에만 150필지 12만6777평을 소유한 것으로 돼있다. 민 씨는 충북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 까지 전국 각지에 막대한 토지를 보유했다.

민병도는 민천식이 소유했던 토지를 20세가 되기 이전에 물려받았다.

취재진이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일원 토지를 조사한 결과 민천식은 채 20세가 되기 이전인 1934년 5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했다.

본보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유포리 토지대장을 전수 조사한 결과 민병도가 소유한 토지 21필지의 최초 등기자는 민병도의 양아버지 민천식으로 나타났다.

이후 1934년 민천식이 소유했던 토지는 민병도로 소유가 이전됐다. 이전 당시 민병도의 나이는 한국나이로 19세에 불과했다.

이렇게 이전됐던 토지는 2년 뒤인 1936년 민영휘가 설립한 신탁회사인 조선신탁주식회사로 다시 소유가 이전됐다.

1947년 다시 토지 명의는 조선신탁주식회사에서 민병도로 돌아왔다.

나머지 6필지의 최초 소유자는 민병도가 최초 등기자였다. 이중 3필지는 1927년 민병도의 명의로 등기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민병도는 27필지 중 절반을 넘는 토지 15필지를 1947년과 1949년에 집중 매각했다.

토지 매각은 2000년대까지 계속됐다. 민병도는 2005년과 2006년에 걸쳐 3필지를 팔아 부를 챙겼다.

민천식이 소유한 토지가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소재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민병도에게 어마어마한 토지가 상속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이섬의 주주, 민□기와 민△기

민천식으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물려받은 민병도는 1960년 남이섬을 사들였다. 이후 남이섬은 관광지로 개발됐고, 현재는 ㈜남이섬으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남이섬에 대해 지난 2000년 중후반 친일재산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민병도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 한국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남이섬을 구입한 것이여서 친일재산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2006년 민병도가 사망한 뒤 민□기와 민△기는 ㈜남이섬의 최대주주였다.

민□기는 한때 ㈜남이섬의 주식 20.48%, 민△기는 13.29%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남이섬 외에도 또 다른 부동산 회사의 대표와 이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법원, 민천식 재산은 민영휘의 차명재산

민영휘의 증손자로 남이섬 지분을 소유했던 민□기와 민△기가 국가와 지자체를 상대로 진행한 땅찾기 소송은 조부 민천식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정받은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

이에 대해 법원은 민천식 소유로 최초 사정된 토지에 대해 “민영휘의 차명재산으로 친일재산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2024년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민천식의 후손들이 경기도 하남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민천식은 이 사건 분할 전 토지를 사정받은 1911년 무렵 (민천식의) 나이가 24세 내지 28세에 불과하고, 이 토지를 사정받을 때 음성군 일대 약 5만㎡ 규모의 토지도 함께 사정받았는데, 나이나 경제활동 사정받은 토지의 규모등에 비추어 볼 때, 러일전쟁 개전전부터 민천식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위 토지를 사정받은 시기는 민영휘가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시기와 근접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민영휘가 민천식에게 명의를 신탁해 사정받은 것으로 주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렇지 않더라도 민천식이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민영위로부터 증여받은 재산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친일재산국가귀속특별 법에 따라 이 토지는 민천식이 사정받았을때부터 국가의 소유”라고 판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