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 굽이굽이 대를 이어 터전일군 토박이들
90여 가구 수용, 16여 가구 인근에 자리 잡기도

나의 살던 고향은…
보호수 아래 외북동 사람들

청주테크노폴리스 개발로 강서 2동 내 외북동, 화계동, 송절동의 120여가구와 10여개의 공장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인위적인 개발로 사라지는 동네의 풍경은 쓸쓸하다. 빈집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밥그릇이 천장에 있지만 사람들은 없다. 어느새 고물상은 용달차를 타고 동네를 돈다. 모판을 100원에 산다며 방송을 한다. 떠나면 더 이상 농사를 질 수 없는 촌부들은 100원에라도 모판을 넘긴다. 이사가는 사람들, 그리고 새 집을 짓는 사람들의 소리가 웅성하다. 이들은 얼마 전 동네 사람들과 마지막 잔치를 벌였다.

강서 2동은 청주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강서면이었다. 1900년대 지도를 보면 강서면에 외북리, 송절리, 왕암리가 나온다. 강서면은 1983년 강서2동으로 편입된다. 인근 송정리에는 이후 1921년 충북선이 놓이면서 송정역이 생긴다. 송정역이 있던 곳은 현재 솔밭공원이  됐다. 1969년에는 송정동과 향정동이 청주산업단지로 바뀐다. 복대동에는 대농이 들어선다.

이후 1986년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하이닉스와 LG화학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지도는 다시 한번 바뀐다. 그러다가 이번 청주테크노폴리스 개발로 이제 마을의 지도뿐만 아니라 청주시내 지도가 바뀌게 됐다. 강서 2동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대를 이어 사는 토박이들이 많다. 경주이씨, 진주강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강서 2동의 마을길은 참 좁다. 청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도시의 모습이 아닌 농촌을 닮아있다. 외북동은 큰마을과 작은마을이 있는데 이번에 청주테크노폴리스개발로 강서 2동에서 가장 많은 가구가 수용된다. 외북동 토박이 정희선(81)씨는 1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린다. 고물을 팔기 위해 쌀자루에 냄비와 프라이팬을 가득 담았다. 버스 정류장 앞 구판장은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오가는 동네사랑방이었지만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혔다.

▲ 정희선 씨는 쌀자루에 낡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가득 담아 고물상에 팔려고 버스를 탔다.

구판장 앞 트럭에서 물건을 나르던 이근희(57)씨는 북촌으로 이사를 간다고 한다. 농사를 계속 짓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다. 외북동 80여 가구가 이번에 수용되는데 그 가운데 16가구는 북촌과 내곡으로 가 새집을 짓고 살 예정이다. 이근희 씨는 “헌집 부수고 새집 짓는다는 데 뭐가 아쉽나”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딱지 받아도 헐값에 팔아

“여기서 노란색 선 본적 있슈?”. 3대째 외북동에서 살고 있는 이진희(68)씨는 대뜸 물었다. “마을 길 대부분이 사유지다. 박정희 정권 때 개인 땅을 희사해 도로를 냈는데 주민들은 해마다 세금도 내고, 이번엔 도로땅이라고 해서 보상도 1/3만 받았다. 80%가 사도다. 양도세까지 물게 생겼다. 5공 때는 그린벨트로 묶여 불편을 겪었다.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만 짓는 사람들이라 어둑하다. 보상을 제대로 못 받으니 딱지를 받아도 제값 못 받고 많이 팔았다.”

집이 수용된 이들은 청주테크노폴리스 내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토지를 평당 110만원에 주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집과 땅이 많지 않는 이들은 딱지를 사더라도 새로 이사 갈 집을 구하기 위해 급하게 팔수밖에 없었다. 지금 딱지는 2배, 3배로 뛰었다. 외북동 곳곳에 부동산업자들이 딱지를 팔라는 플래카드와 주민들이 내건 보상을 현실화해달라는 내용이 뒤엉켜있다.

▲ 외딴집 김인자씨는 묵은지 10독을 남겨놓고 어디로 가서 장사를 해야 할지 요즘 잠이 안온다.
▲ 외딴집 전경. 한 때 닭도리탕, 오리백숙이 인기가 좋았다.

외딴집 김인자(59)씨는 요즘 밤에 잠이 안 온다. 15년 동안 ‘외딴집’식당을 운영했던 그는 이번에 건물이 수용되면서 떠나야 한다. 외딴집은 말 그대로 덩그러니 뚝 떨어져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맛집이라고 소문도 났다. 그는 다시 장사를 어디서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아직 집이 헐리지 않았는데도 이미 사라진 줄 알고 손님들이 끊겼다. 여기서 장사할 때는 내가 다 농사지어서 했는데 이사 가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무엇보다 지난 김장 때 내년 봄까지 쓸 김장을 5000포기했다. 묵은지 10독을 가져갈 수 있을지 김치를 볼 때마다 속상하다. 미리 알았다면 많이 담그지 않았을 텐데 김치 재료도 다 농사지었다.” 김씨는 묻어놓은 김칫독을 보면서 콩재를 연신 덮었다. 그래야 김치가 덜 쉰다면서.

송정역에서 기차타고 통학

김정환(85)씨는 외북동 보호수 아래에 서 있다. 경주김씨 19대조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는 그동안 무럭무럭 자랐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쉼터였다. “여름에는 여기서 친구들이랑 나무를 타 오르기도 하고, 그늘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마실 나왔다. 동네 장사들이 아이스깨끼 통을 가지고 다녔다. 어물 장사, 새우젓 장사도 머리에 이고 지고 많이 팔려 다녔다.”

▲ 외북 2동 김정환씨의 19대 선조는 이곳에 보호수를 심었다. 보호수 그늘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았으며 고단한 몸을 쉬었다.

보호수의 수령은 200년으로 기록돼 있다. 김씨는 “한대가 30년이라고 쳐도 족히 300년은 넘은 나무”라고 소개했다. 다행히 보호수는 이번 개발에서 제외돼 마을을 앞으로도 지키게 됐다.

김씨는 5대째 이곳에 살고 있다. 일정 때는 주성초 전신인 영정소학교에서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고, 6.25때는 경북 선산까지 피난을 갔다 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다녔다. “중앙동에 있는 청주역에서 학교까지 뛰면 5분이면 도착했다. 집에 오는 기차는 연착할 때도 많아 밤늦게 뒷산을 가로질러 온 적도 많다. 석탄을 때서 가는 기차가 봉명동 고갯길을 올라가지 못해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적도 많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교에서 교장까지 역임한 그는 외지로 발령을 받아도 고향집을 떠나지 않았다. 이사를 가도 일주일에 한번은 다시 고향에 올 것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절반이 아직 남아있고 보호수도 후손으로서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향정동, 송정동이 먼저 산단으로 개발이 돼서 사람들이 떠났다. 그 때 사람들이 개발되면 좋은 줄 알았다. 그런데 떠난 사람들 보면 제대로 잘 사는 사람이 없다. 농사짓고 여기서 살면 뭐라도 먹고는 살 수 있는 데 밖에 나가면 까먹을 일밖에 없다.”

외북동 사람들은 지난 12일 대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김씨는 “떠나기 섭섭하지. 그냥 살았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도 어쩔 수가 있나”라고 에둘러 말했다.

보호수 위에는 까치가 집을 짓고 연신 먹이를 나르고 있었다. “까치? 해마다 집을 여기가 짓는다.” 까치는 돌아올 곳이 있는 데 사람들은 갈 곳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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