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있다기에 선물 주는 줄 알았는데 고공농성 시작”
유성기업 희망버스 “힘들면 내려와. 우리가 함께 할게”

▲ 고공농성중인 이정훈 씨의 아내 한영희 씨. 그는 결혼기념일 철탑농성을 시작한 남편에게 서운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진/육성준 기자
▲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2500여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힘들면 내려와라. 우리가 함께 할께”라고 외치며 이정훈 지회장을 격려했다. 사진/육성준 기자
▲ 유성기업의 노조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고공농성중인 이정훈씨가 희망버스 참가자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육성준 기자
▲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백기완 선생. 그 조차 한영희씨의 말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 사진/육성준 기자
▲ 길게 늘어선 희망버스 행렬. 이날 서울 등 각지에서 97대의 희망버스가 참가했다. 사진/육성준 기자
▲ 옥천 광고탑 농성장위 경부 고속도로에 길게 늘어선 경찰버스. 노동자와 사회에 처진 차단선 같은 분위기가 풍겨난다. 사진/육성준 기자

“ 안녕하세요. 저는 154일 째 철탑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정훈 지회장의 아내 한영희입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제 남편과 노조를 응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게 좋으면서도 막상 뭔가를 이야기하려니 떨리기만 합니다.

제 남편 이정훈 지회장은 작년 10월 13일 철탑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전날 밤 할 말이 있다 길래 늘 노조 일로 바쁜 사람이 그래도 결혼기념일은 기억 하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기념일인 줄 모르고 날짜를 잡았다며 철탑농성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서운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154일째 고공농성중인 유성기업 노동자 이정훈씨의 아내는 편지글을 낭독했다. 아내가 편지글을 낭독하는 동안 22미터 광고탑 위 사내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옥천 나들목 근처에 모인 2500여명의 참가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유성기업 희망버스를 최초 제안한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의 늙은 눈가에도 눈망울이 맺혔다. 그러기를 잠시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외쳤다. “힘들면 내려와라. 우리가 함께 할께.”

지난 3월 15일 유성기업 영동공장과 옥천나들목 주변 광고탑에서 진행된 ‘힘내라 민주노조’ 유성기업 희망버스.  2500여명 참가자의 참가자들은 한 여성의 편지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여성은 다름 아닌 고공농성중인 이정훈 지회장의 아내 한영희 씨. 난생 처음으로 집회장에 나왔다는 그는 준비해온 편지글을 또박 또박 낭독했다.

“한 달이면 돼?”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잘만 끝나면 한 달도 안돼서 내려올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섯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건강하게만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2011년 5월 18일 회사에서 공장을 폐쇄하고 용역깡패를 투입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기가 막혔습니다. 수 십년을 일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싶어서 사장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청춘을 다 바쳐서 일했는데 남편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두들겨 맞으며 공장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두려움도 있었지만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직장폐쇄가 된 후 남편은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을 남편은 비닐하우스에서 보냈습니다. 어느 날 군대를 제대한 아들과 아산 공장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갔는데 가뜩이나 마른 사람이 정말 더 비쩍 마른 채로 환히 웃는데 차마 그 앞에서 눈물도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편지글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갑자기 맞닥뜨린 현실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베어 있었다.

“서운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편지글을 낭독했다.  “ 대통령이 나서서 유성투쟁을 두고 고액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며 투쟁을 비난하고 나설 때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해도 이렇게 비난 받을 수 있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쇠파이프에 두들겨 맞는데도, 자동차로 사람을 치는 살인적인 행위를 했는데도,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경영진인데도 대통령이 나서서 노동자를 비난하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남편이 노조를 지키겠다고 하는 모습에 나쁜 소리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저 원만히 해결되기만을 바랐을 뿐이라고.
그는 남편이 1993년 처음 영동으로 내려왔을 때 받은 월급이 16만원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 저는 노동조합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 남편과 유성 조합원들이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제 남편과 유성조합원들은 해고당한 동료들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서로가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일할 수 있는 공장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인간다운 삶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저는 그게 민주노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희망버스를 타고 오신 여러분들도 모두 지키고 싶은 게 그런 것이겠지요.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내사랑 민주노조’라고 하더군요..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게 함께 해주십시오.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 희망버스 행사장 주변은 그의 눈물과 달리 긴장감이 흘렀다. 1800여명의 경찰과 수십대의 경찰 버스는 위압감을 풍겼고 행사장을 고립된 섬 같은 풍경으로 만들었다.

행사장 입구에 급하게 설치된 AI(조류독감) 방제 설비는 을씨년 스런 느낌을 풍겼다. 애써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과 국가 사이에 경찰버스와 AI 방제설비의 차단설이 설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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