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에 대해 문화적 고찰 폭넓게 시도한 <갑과 을의 나라>

장선배
충북도의원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트집 잡아 몇 차례 라면을 다시 끓여 오라고 하면서 잡지를 말아 여승무원 얼굴을 때린 대기업의 ‘라면상무’. 차량 이동주차를 요구하는 호텔 지배인의 뺨을 때린 베이커리의 ‘빵회장’. 남양유업의 제품 밀어내기와 영업담당 사원의 대리점주에 대한 폭언. 잇따라 폭로된 편의점 업계의 가맹점주 착취와 횡포.

최근 ‘갑’의 부당한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 ‘을’의 문제를 부각시킨 사건들이다. 사회적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고, 정치권에서도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을의 지위향상을 위해 정치’를 내세우면서 상설 위원회를 설치해 남양유업 방지법, 가맹점주 보호를 위한 가맹사업법, 경제민주화 법안 등 여러 법제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갑을관계’는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리사회에 투영된 갑을관계의 본질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과연 무엇인가?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가 최근 써 낸 <갑과 을의 나라>는 이런 의문점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갑을 관계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고, 경제적인 분야에만 한정시켜 생각해 왔었다. 경제민주화가 안된 상태에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당한 비경제적인 요소로 여겼다. 그래서 경제민주화가 하루 빨리 진척돼야 한다는 정도였다.

▲ 제목 : 갑과 을의 나라 저자 : 강준만 출판사 : 인물과 사상사
그런데 이 책에서는 갑과 을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우리사회에 오랫동안 내재된 구조적인 것이며 전 사회적으로 만연된 부조리하고 부도덕한 '갑을 문화'의 소산으로 분석했다. 폭넓은 갑을관계 문화 추적에 대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갑을 관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모두 4장으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장에서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치하, 미군정,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 등 시대별로 갑을관계 역사를 보여준다. 초강력 중앙집권제 하에서 서열주의와 관존민비가 갑을관계의 원형이라고 분석하며 군사정권하에서 관료조직이 정권에 충성하는 대신 국민에 군림하는 관료조직의 정치적 도구화를 지적한다.

경제민주화 돼야 불공정 바로 잡는다

그리고 두 번째 장은 브로커의 역사다. 갑을관계가 낳은 사생아로 규정하고 시대 상황별로 브로커의 행태를 정리했다. 해방정국의 통역관, 군납, 부동산, 법조, 이민, 세무, 병무 브로커 등 브로커 백태를 보여준다.

브로커 문화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형님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세 번째 장은 선물의 역사다. 우리나라 특유의 정 문화와 공짜문화가 선물문화를 형성했고 이는 곧 ‘탈을 쓴 뇌물’이 됐다. 자유당 정권에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선물이 유통됐고 경제발전기에는 상납문화로 이어져 부패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네 번째 장은 시위의 역사다. 해방 이후 커다란 시위들의 배경과 형태, 의미를 분석했다. 저자는 시위를 권력자의 ‘갑질’에 시달려온 을의 반란으로 보고 있다. 시위는 을의 억울함의 호소이고 억울함은 억압과 차별과 소외에서 오는 갈등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는데서 온다고 평가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갑을관계의 불공정을 바로잡는 것이 경제민주화이며 대중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아래로부터 위로 개혁명제를 세우는 귀납적 개혁을 제시한다. 또 갑을관계에서 오는 ‘증오의 종언’을 위한 ‘을의 반란’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이라고 결론짓는다.

한국의 근현대사에 형성된 갑을문화에서 갑이 을에게 저지르는 횡포의 범위와 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갑을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은 ‘을’ 뿐만이 아니라 ‘갑’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나누는 성장과 혁신의 차원에서 갑을관계 타파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동안 정치, 사회, 역사, 문화, 언론 등 각 분야에서 숱한 우리사회의 의제들을 공론의 마당으로 끌어냈던 저자는 이 책에서도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또 각 시대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많은 언론보도와 자료들을 잘 정리해서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볼 수 있도록 해 준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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