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금고 20억대 사기대출 관련자, 다른 사기꾼에 15억원 날려
정치인·연예인 동원해 “백화점 납품하게 해주겠다” 10개 업체 속여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이 있다. 자기 재주를 과신하는 사람에게 경계해 이르는 말인데, 지역 업체와 관련된 사기사건에서 이 같은 비유가 적절한 일이 일어났다.
지난 10일 서울 강남경찰서는 대기업 방계 기업의 협력사를 자처하며 농축산업자에게 로비자금을 뜯어낸 C업체 대표 안 모씨를 출국정지 시키고 뒤를 쫓고 있다. 안 씨는 강원도와 충북 소재 농축산업자 등 10개 업체를 상대로 전국의 백화점과 마트 등에 물건을 납품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금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안 씨는 지난해부터 농축산업자들을 만나 전국 백화점과 마트에 납품시켜주는 것은 물론 방송국을 만들어 홍보해 주겠다며 작업(?)에 들어갔다. 사기에 걸려든 업체 가운데는 지난해 도내 최대 금융사기사건이었던 새마을금고 사기대출 사건에 연루된 육가공업체 H축산도 포함됐다.

C업체, 대기업 협력사 사칭
현재까지 10개 업체가 사기를 당한 것으로 파악된 가운데, 용인시 소재 두부제조기 생산업체 H전자가 가장 많은 8억원을 로비자금으로 건넸고, H축산이 두 번째로 많은 2억5000만원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금액을 전달한 고소인 대표 박 모씨는 “이번 사기사건으로 10여 년간 운영하던 업체를 문 닫았다”며 “유력 정치인은 물론 유명 연예인을 내세웠고, 협력업체 계약서를 제시하는 등 모든 것이 완벽해 속을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들을 속인 C업체는 지난해 6월 전국 9개 백화점과 마트, 중형슈퍼, 편의점체인까지 운영하고 있는 국내 대표 유통재벌기업의 1차 협력사인 C사가 입주해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B빌딩 6층에서 창립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K 전 의원은 물론 1차 협력사 관계자도 참석했다는 것이 박 씨의 주장이다.
박 씨는 “C사는 유통 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업체다. 업체 대표가 대그룹 총수의 조카로 2006년부터 백화점과 마트에 들어가는 농축산물 유통을 전담하다시피 한 업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업체명도 C사의 다른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E&C’를 사용했고, C사와 계열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 있다 보니 안 씨의 말을 믿었다”고 말했다.
박 씨가 말한 C사는 대기업 총수의 방계 계열사로 2002년 설립돼 총수와 혈연관계라는 이점으로 백화점과 마트에 독점적인 납품을 해온 업체다. 창립식 자리에서 안 씨는 C사와 체결한 납품계약서를 보여주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이 납품계약서 또한 허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 씨는 “A씨는 공공연히 정치권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지난해 6월 20일에는 H축산 대표가 A씨와 K 전 의원이 천안 우정힐스CC에서 골프접대를 하고 함께 대형마트 입점 실사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K 전 의원 골프접대 받아
이날은 H축산이 청주시 비하동 개점 예정인 대형마트 직원들로부터 공장 실사를 받던 날이었다. 이 자리에서 K 전 의원은 “이 정도면 입점시켜도 되겠다”는 발언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신문 11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 같은 주장에 대해 K 전 의원도 함께 골프장에 간 것을 인정했다. 이 신문보도에 따르면 K 전 의원은 “입점 브리핑 장소는 예정에 없다가 밥을 먹으러 갔을 뿐”이라며 “현지 발언도 이 정도 시설이면 마트에 입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밝혔다.
H축산은 지난해 청주 소재 한 새마을금고에서 수차례에 걸쳐 20여억원을 대출받은 업체다. 이 과정에서 H축산은 조작된 감정평가서를 통해 실제 담보물건보다 거액의 대출을 받아 사기대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관련자가 100명에 이르고 대출 총액이 120여억원에 달하는 등 등 도내 금융사기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여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사건이기도 하다. H축산은 100억대 대출사기를 주도한 J씨로 부터 담보물건을 제공받는 등 이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로비자금, 사기대출로 마련
H축산이 새마을금고로부터 대출을 받은 금액은 모두 20여억원. 그 가운데 2억5000만원을 로비자금으로 안 씨에게 전달하고, 실체도 없는 안 씨의 마트입점 약속 때문에 시설투자에만 10억원 이상을 쏟아 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인 대표 박 씨는 “H축산은 백화점과 대형마트 입점 자격기준을 맞추기 위해 무리한 인력채용과 시설비를 투자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H축산은 새마을금고의 불법대출 사건이 내부 감사를 통해 적발되면서 상환압박을 받아오다 최근 문을 닫았다. H축산 관계자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H축산 대표 등 임원진은 집까지 담보로 잡히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관계자는 “20억원 가운데 일부는 불법대출이지만 나머지는 정상적인 대출이었다”며 H축산도 사기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H축산은 불법대출로 받은 돈의 상당부분을 사기 당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H축산은 최근까지도 안 씨의 약속을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새마을금고는 감사에 적발된 후 대출금 회수를 진행했다. 당시 H축산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 수일 내에 대형마트에 입점이 시작되니 그때가 되면 대출금을 납부할 수 있다”며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H축산은 사기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사기 당사자란 점에서 동정여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로비를 위해 불법대출을 받은 격이 됐기 때문이다.
도피행각 중인 안 씨의 사기행각은 치밀했다. 안 씨는 한국농축산방송국을 설립할 계획이라며 방송국이 설립되면 방송 홍보가 가능하다고 업체들을 속였다. 이 과정에서 방통위 로비자금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방통위와 관련된 또 한명의 유력 정치인을 로비대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박 씨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 신사동의 모 일식집에서 만나 방송국을 만드는데 필수인 스튜디오는 서울예대에서 제공해주기로 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안 씨가 마련한 이 자리에는 서울예대 교수 2명과 유명 탤런트 출신으로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하는 박 모씨도 동석했다. 해당 학교 교수까지 함께 한 자리에서 나온 말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서울 강남경찰서가 조사 중인 이번 사건은 고소인들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정계와 재계·학계가 연루된 사기사건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박 씨가 거론한 정치인들은 현재까지도 정당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는 원로들로 파장이 예상된다.
한편 서울 강남경찰서는 조만간 안 씨의 신병을 확보해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