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대표 33인 중 정춘수 등 4명 약속장소 안나와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눠 대표를 선정해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 15명, 16명, 2명씩 참가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1919년 3월1일에 약속 장속인 태화관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등 4명이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는 손병희처럼 복역 중 병을 얻어 곧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친일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오르는 등 친일파로 꼽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최린, 박희도, 정춘수가 대표적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충청권 출신으로는 손병희(청원·천도교 전교주), 권동진(괴산·천도교), 권병덕(청원·천도교), 이종일(충남 태안·천도교 월보부장), 신석구(청원·개신교·남감리교 목사), 신홍식(청주·개신교·북감리교 목사), 한용운(충남 홍성·불교·승려) 등 7명이다.

△ 손병희(1861~1922)는, 청원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2년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는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됐고,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1922년 사망했다.

△ 권동진(1861~1947)은,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사귀었던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해 도사(道師)가 되어 전도에도 종사했다. 1919년 3·1운동 때 천도교측 15인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에는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활동했고, 신간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 권병덕(1868~1944)은, 10대에 동학에 입교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보은의 동학 교도들을 이끌고 참가했다가 패퇴했다. 1912년 천도교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 이용구, 김연국의 시천교가 창설되었을 때 여기에 합류하여 시천교 종무장을 지냈다. 그러나 다시 천도교로 돌아와 손병희의 권유를 받고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가했으며,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 이종일(1858~1925)은 15세에 상경해 한학을 공부했으며, 김윤식·이도재·이상재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전수받았다.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청년애국회에 관여하는 한편, 2월에는 유영석등과 함께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됐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배포했으며,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했다.

△ 한용운(1879~1944)은, 호는 만해.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장례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 신석구(1875~1950)는,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신앙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다. 1919년 2월 12일경 오화영(吳華英)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한 뒤 민족대표로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일경에 구금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표명했다.

△ 신홍식(1872~1937)은, 30세에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뒤 서울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1913년 졸업한 뒤 공주감리교회 목사로 취임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로 전임하여 목회활동과 함께 교육사업을 했다. 1919년 2월 14일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평양에 온 이승훈에게 서울에서 준비하고 있는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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