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중당 후보로 출마… 노동자 정치를 꿈꾸다
민주노조,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②
전 속리택시 노조위원장 이효식

저는 택시노동자입니다. 제가 (국회의원) 출사표를 던진 이후, 노동자 후보에 대해서 의견들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공고 밖에 못 나와서 가방끈이 짧아서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노동자는 정치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알고 보니까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택시노동자가 무슨 돈이 있다고 국회에 나왔느냐’ 상식적으로 볼 때 그 분들의 말씀도 지당합니다. 지금까지 국회의원 누가 만들었습니까? 국회의원은 민의의 대변자라고 하는데 주민들의 민주적인 의사가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돈! 돈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가난한 노동자가 무슨 국회의원이냐 그러는 것입니다.”
충북 최초의 노동자 후보
1992년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한 택시노동자 이효식(전 속리택시 위원장)은 이렇게 외치며 충청북도에서 최초로 노동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이 속해있던 민중당 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임광토건 회장이었던 민자당의 임광수 후보, 꼬마 민주당의 변호사 출신 정기호 후보, 박찬종 씨가 대표로 있던 신정치개혁당의 류병두 후보와 경쟁해 5871표(5.02%)를 얻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중의당’ 소속으로 출마했던 김재수(현 우진교통대표)가 있었지만, 현직노동자로서 출마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본격적인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치가 그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처음’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이효식 전 위원장은 “출마를 결심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고 했다. “노동자가 정치를 한다는 게, 그리고 꼭 그것이 본인이어야 되는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없던 속병까지 생겼다”며 당시의 어려웠던 시간을 회상했다. 하지만 노동자가 정치를 해야만 깨끗하고 평등한 세상이 올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밀알이 되고자 하는 심정으로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의 선거 분위기는 어땠을까. “모당의 후보는 100억원을 넘게 썼다”는 말이 돌 정도였고, 어떤 유권자는 동일한 후보에게 음식점에서 세 번을 대접받았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금권선거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그런데 가난한 택시노동자인 그의 선거홍보물은 A4용지 1장 앞뒷면에 흑백으로 인쇄된 것이었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다.
그 홍보물에는 “썩은 고목에 물주지 말고 새싹 키워 희망찾자”는 슬로건이 앞면 제일 상단에 있다. 뒷면에는 “(91년) 한해 월급생활자 1200만명이 (월급으로) 60조를 받았는데, 재벌들이 땅 투기, 증권들이 불로소득으로 벌어들인 돈이 3백조원”이라며 재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또 “식구라야 고작 세 명인데 지하실에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연습장이 2곳이나 있고, 거실과 침실사이에는 ‘글래스 블록’으로 칸막이를 해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창문에는 원격조정장치를 부착해 침대에 누워서도 리모콘으로 창문을 여닫도록 했다나요? 어떤 사람은 해마다 오르는 전세값 200만원이 없어 봄철만 되면 이사걱정을 하는데, 어떤 이는 2억이란 돈을 봄 기분 한번 내는데 쓰는 사회”라며 불평등한 세대를 비판했다. 그리고 만평 그림에는 정주영 씨가 돈을 가득 쌓아놓은 가운데 “대통령 자리도 돈으로 사겠다”는 글귀가 들어가 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이효식 전위원장은 무엇을 주장했을까. 우선 “재벌들의 불로소독을 뽑자”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선 “재벌들의 비업무용(부동산 투기용) 토지를 즉각 환수하고, 토지초과 이득세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공직자와 정치인의 재산을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진보정치 밀알이 되고자 했지만…
이효식 전 위원장은 현재 당적이 없다. 1992년 선거후 민중당은 해산됐고 뒤를 이어 ‘진보정당추진위’,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까지는 당적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인가 당적이 없어졌다.
“민주노동당 분당, 통합진보당으로 합당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무 당적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최초로 노동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그였지만, 어느 순간 ‘진보정당’의 울타리 밖 존재가 되었다. 속리택시에서의 해고 이후에 세력도 돈도 없는 그를 찾는 진보정당의 발길도 어느 순간에 끊겼다. 그를 아는 한 지인은 이 과정에서 “이효식 전위원장이 많이 외로워했다. 본인은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엔가 주변부로, 어느 순간엔가 이방인으로 된 것 같아 힘들다”고 전했다.
그런 이효식 위원장에게 물었다. “그 때, 국회의원 출마했던 것을 지금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답했다. “출마를 결심했던 이유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도 똑같아요. 밀알이 되고자 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했고, 그래서 지금은 이용상(청주시의원, 전 충북전자 해고자)씨 같은 분이 의원도 됐잖아요. 작은 기여는 했던 것 같아요. (이용상 의원이) 잘 해주었으면 해요.”

진보정당을 하는 후배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해 달라고 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요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요. 하지만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해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세상이 나아진 게 별로 없어요.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너무 힘들어요. 진보정치는 꼭 필요해요. 그래서 더 크게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효식 위원장은 2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말수가 적다. 체구는 작고 선한 눈빛을 가졌다. 20년 전 그의 활동 유인물을 봐도 과격한 것이 없다. 당시 국회의원후보 선거운동 사무실을 개소하는 날 그는 ‘참사랑’이란 노래를 아내와 불렀다. 하모니카로 연주도 했다. “바람 불어도 눈보라 쳐도 그대 당신은 내사랑…. 거친 손가락 못생긴 얼굴 당신은 나의 참사랑”
그런 그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을 저미는 기억이 있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아내가 막 울고 있어요. 화를 절대로 내지 않던 아내가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회사에서 다른 노동자를 위하는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나와 아이를 울리는 나쁜 사람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날이 아내 생일이었어요.
2번의 해고를 겪고 하느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때였죠. 그날 아이가 500원을 내고 타는 놀이기구가 있었는데 그 500원이 없어서 아이가 울었대요. 그리고 아내도 울었대요.” 이 말을 하던 그 순간 57세의 이효식 전 위원장의 눈시울은 그때처럼 똑같이 불거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