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선기 ‘걸어서봉하까지’ 2012 도보행진 기획단장

김선기(26, 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재학) 기획단장은 주변에서 '바른생활 사나이'로 통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시쳇말은 딱 그를 두고 하는 말일 듯싶다.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언제나 밝게 웃으면서도 침착하게 일을 헤쳐 나간다. 어쩔 때는 '답답할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도 한다.

걸어서봉하까지 단원들과 MT를 가던 어느 날, 김 단장은 일신상의 이유로 다른 한 단원과 함께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다. 일찍 온 단원들이 미처 빠뜨린 식료품 일부를 김 단장에게 사오라고 했지만, 뒤늦게 함께 온 단원이 어두운 밤 버스도 잘 안 오는 시골에서 김 단장에게 택시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여기서 김 단장이 약간 멈칫했다는 후문.

이유인즉슨 후원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김 단장의 원칙과 소신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원들이었기에 웃어 넘어 갈 수 있는 일이었다. '바보 노무현'처럼 '바보 김선기'는 순수함 하나로 이번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 다음은 김 단장과의 일문일답. 


- 어떤 연유로 '걸어서봉하까지'를 계획하게 되었나.

지인 중에 재작년 6.2 지방선거가 끝난 후, 서울 국민참여당 당사부터 경남 봉하마을까지 혼자서 도보여행을 했던 분이 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서봉하까지’ 첫번째 영감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목적과 의미가 들어가면 좋을 듯 싶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정형화된 국토대장정이 아닌 도보행진을 하며 세미나 강연과 그 외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단원들과 젊은 날에 깊이 고민하고 생각을 공유하며 뜻 깊은 시간이 되고 싶다.

-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 있나.

처음 시작하는 행진단이기에 ‘걸어서봉하까지’ 2012 도보행진을 준비하면서 많이 넘어지고 좌절했었다. 우리들 안에 전수된 지식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조건 부딪히는 것이었다. 보통 행진단이 100을 준비하면 우리 행진단은 200을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하나씩 준비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하나씩 줄여 갈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단원들은 하나로 더욱 결집될 수 있었다. 짜여진 과정이었다면 설렘도 벅참도 적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하나하나 새로울 수 있었다.

- 사전답사를 했었다.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먼저 세종시에서 봉하마을까지 사전답사를 며칠 간 나눠 갔었다. 등에 노무현 전 대통령 포스터를 붙이고 걸었다. 충청도를 지나 경상도에 접어들 무렵, 지나가던 덤프트럭 운전기사 분이 “우리 노짱님 메고 어디가냐”면서 맛있는 밥 사 먹으라면서 얼마간의 돈을 주시기 했다.

대구 인근 도로를 지나 갈 때, 또 어떤 분은 차를 타고 가시다 우리를 보고 음료수를 사서 다시 돌아온 분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 분은 “대구가 한쪽으로 치우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많은 국민들 가슴 속에는 아직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 도보행진을 정치적 색깔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우선 상대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는 분들을 존중해 주는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흠모하는 이들의 입장도 그분들이 이해하고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나누는 이분법적인 접근은 옳지 않다. 경남 지역을 지나가며 뭔가 이질감을 크게 느꼈다. 나를 비롯해 우리나라 국민들 모두가 이것을 뛰어넘었으면 좋겠다.    

- 세종시에서 봉하마을까지 도보행진 후 향후 계획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바라기는 이번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 속에서 앞으로도 매년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를 기억하고 제 2, 3의 청년 노무현이 나오는 일에 ‘걸봉’(걸어서봉하까지의 줄임말) 도보행진이 쓰여 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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