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애란 명창, 두 번째 완창 박동실제 심청가를 부르다

사진/육성준 기자

때로는 심장이 터질 듯이, 때로는 읊조리듯이…. 굵고 힘 있는 조애란 명창(36)의 ‘소리’는 서편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동편제의 힘이 가미된 그만의 소리세계를 보인다.

지난 2일 저녁 청주예술의전당에서는 청주에서는 좀처럼 만나볼 수 없는 판소리 공연이 열렸다. 그것도 완창이다. 조애란 명창의 두 번째 완창무대다. 조 명창은 스승인 정순임 명창을 모시고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하나인 심청가(박동실제)를 3시간여에 걸쳐 완창했다.

“송태조 입국지초에…” 아니리로 시작된 심청가는 중모리와 자진모리 진양조를 넘나들며 관객들의 눈과 귀를 붙잡아 두었다. 완창무대를 함께한 관객들은 오랜만에 만나보는 반가운 무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2년간의 준비과정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아니다. 경남 남해 출신인 조 명창이 청주에서 소리꾼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때부터, 스물하나 평범했던 여대생이 소리에 이끌려 유성준 명창을 찾아간 그때부터 외지인, 비전공자라는 사회적 편견과 싸워낸 짧지만은 않은 소리인생의 결과물이다.

공연 하루 전 마무리 연습이 한창인 조 명창을 찾았다. “보통의 토막소리는 판소리의 전체적인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하다. 완창을 하려면 공력도 쌓여야 하고 체력적인 요소도 뒷받침돼야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스스로도 일종의 성취감과 관객들에게 온전히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우연히 접한 판소리에 매료됐다는 조 명창은 이후 유성준 명창과 김추자 명창을 찾아가 소리를 사사받았다. 조 명창은 “처음부터 이 길이 나의 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대학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결국 소리를 놓을 수 없었다. 스승님들의 도움으로 무대에 서게 됐고, 조금씩 인정받게 되면서 어느덧 내 인생이 됐다”고 말했다.


조 명창이 청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경주에서 지금의 스승인 정순임 명창을 만나 소리를 배울 무렵이었다.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공연을 해오던 그는 부산에서 충청북도 지정예술단인 놀이마당 ‘울림’을 만나게 됐고, 객원멤버로 함께 공연을 하게 됐다. 그리고 청주에 소리꾼이 많지 않다는 말에 ‘울림’과 함께 2005년 청주행을 결심했다.

“무작정 올라오기는 했지만 스승님과도 멀리 떨어져 기댈 곳이 없었다. 공연활동은 꾸준히 해왔지만 외로운 시기였다.” 조 명창은 2006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김철준 씨(35)와 가정을 꾸몄다. 남편은 인생의 반려자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다. 국악 가운데서도 타악을 전공한 남편은 고법(판소리에서 북을 치는 방법)에도 능해 아내와 함께 무대에 섰다.

결혼으로 심신의 안정을 찾았지만 소리꾼으로 정진하는 데는 오히려 어려움이 생겼다. 조 명창은 “완창은 이미 한차례 경험이 있다. 2002년 남해에서 동초제 심청가를 완창했다. 청주에 온 직후부터 완창을 준비했다고 해도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이가 태어나 소리에 전념할 수 없었다. 6년이 지난 이제야 바랐던 일을 해냈다”고 말했다.

조 명창이 청주에서 완창을 선보이고자 했던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판소리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청주에서는 전통 판소리 무대가 마련될 기회가 적다보니 퓨전국악무대가 그가 설 수 있었던 무대의 전부였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한다고 하니 경기민요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경기민요를 익혀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내가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라는 것이 잊혀져가는 것 같아 불안감을 느꼈다. 완창무대를 통해 정통의 소리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것이 나의 본연의 모습이라는 점도 알려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조 명창의 스승인 정순임 명창은 제자에 대해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 명창은 “내년에도 완창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프로젝트 그룹도 준비하고 있다. 소리에 더욱 매진해 시민들에게 전통 소리의 아름다움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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