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상 충청리뷰대표

또 한명의 노동자가 땅을 거부하고 힘겹게 하늘에 매달렸다. 부산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40대 여성 노동자의 고공시위가 220일째를 맞은 지난 18일, 청원군 부용면 아세아제지(주)의 100m 높이 공장 굴뚝에 새도 아닌 사람이 둥지를 틀었다. 이 회사 환경과에서 꽃다운 청춘부터 20년을 몸담아온 박홍중 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울려퍼지던 날, 박씨는 회사측의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설마설마 마음을 졸여왔지만 통보를 받은 박씨의 머리속은 하얗게 비었다. 박씨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현실 앞에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는 결기가 생겼다. 어쩌면, 박씨의 결기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몇달 전부터 해고압박을 가해온 회사측 간부와 이에 동조한 노조위원장이 그들이다.

회사 간부는 “경영 합리화를 위해 소각로와 보일러 관리를 아웃소싱하겠다”며 환경과 직원들에게 명예퇴직을 요구했다. 그들의 ‘수호천사’라고 믿었던 노조위원장은 “사표를 쓸 수밖에 없다”며 등을 돌렸다. 박씨를 포함한 4명의 동료는 끝까지 명퇴를 거부했다. 40대 중반 나이에 새 직장 찾기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고 사측이 제시한 명퇴금은 자영업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박씨는 청주노동인권센터를 찾았다. 전담 노무사의 도움으로 4명의 해고 노동자는 충북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다. 지방노동위원회는 2개월만에 명쾌한 입장을 밝혔다. “이 회사는 5년연속 경영 흑자를 달성하고, 주주들에게 높은 이윤을 배당했다. 또한 경영성과 달성을 이유로 사원들에게 특별성과급까지 지급하는 등 매우 건실한 경영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고 사유는 이유없다”. 부당해고 판정과 함께 30일 안에 복직시킬 것을 사측에 주문했다. 하지만 사측은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 역시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 ‘경영 합리화 조치’ 등의 이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측의 무리수를 지적했다. “전환 배치 등 해고 회피 노력을 하지 않았고, 해고 대상자 선정이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경영상으로 어렵지도 않은 회사에서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특정한 노동자들을 솎아냈다고 본 것이다. 상식을 가진 회사라면 이쯤에서 포기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박씨는 조만간 원대복귀 연락이 올 것으로 믿었고 출근하는 꿈도 꿨다. 올 1학기 대학생 딸의 등록금은 가까스로 꿔서 냈지만 2학기는 한시름 놓았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아세아제지는 달랐다. 4명의 직원을 내치기위해 세번째 칼을 빼들었다. 지난 6월 법원에 노동위원회의 판정을 취소시켜 달라는 정식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작년 12월부터 6개월간 노동위원회에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낸 박씨는 앞으로 몇년이 걸릴 지 모를 법정다툼에 눈앞이 캄캄했다. 해고동료 3명과 함께 충북도청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복직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개월간의 긴 장마를 그렇게 누비고 헤맸지만 회사측은 요지부동, 노조 또한 모르쇠였다.

부인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자식들 입에서 대학 휴학 얘기가 튀어나왔다는 동료의 고백에 술잔은 눈물잔이 되버렸다. 박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어진 현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잠 못 이루던 새벽, 박씨는 꿈에 그리던 일터로 날아갔다. 100m 상공의 굴뚝에 ‘정리해고 철회’라는 꼬리를 내리고 결연하게 앉았다. 아세아제지의 인간 굴뚝새가 언제 지상으로 내려올 지…. 진정한 상생의 세상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풀어낼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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