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성당→오창 농가→수동성당→마동분교로 옮겨 다녀
소통하지 못하는 지역사회 갈등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

[쿨한 노무현 막힌 추모위] 2009년 5월 23일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시민들은 분향소가 설치된 상당공원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시민합동 분향소에서 시민들은 스스로 상주가 됐으며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시민들이 빵, 음료, 초, 생수, 종이컵, 김밥 등 분향소 운영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을 나누면서 훈훈한 공동체의 모습도 보여줬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은 채 음식을 날랐다. 도청에 설치된 공식분향소는 썰렁했지만 상당공원 분향소로 향하는 줄은 밤늦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2년 전 청주시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함께 촛불을 밝혔고, 추모 공연을 올리며 그를 끝까지 보내지 못했다.

첫날 밤 천막은 누가 세웠나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비는 2m도 채 되지 않지만 갈 곳이 없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그간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지역뉴스는 온통 ‘추모비’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발이 달리지도 않은’ 노무현 추모비는 왜 2년간 수동성당과 청원군의 한 농장, 그리고 마동분교까지 떠돌게 된 것일까.

역시 이 이야기는 지난 2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첫날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당시 김연찬 서원대 교수를 비롯한 노사모 회원 몇몇이 서거 당일 청주 시내 한 감자탕 집에서 모여 분향소 설치를 논의한다. 이들은 분향소 장소로 ‘상당공원’을 택하고 신속하게 천막을 쳤다.

김연찬 교수는 “분향소가 설치된 일주일 내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오롯이 상주노릇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민단체도 당시 열린우리당도 분향소를 설치할 때 나서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이 분향소를 꾸린 주최였다”고 강조했다. ( 9면 인터뷰 상자 기사 참고)

하지만 송재봉 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서거당일 노사모 대표와 몇몇 시민단체 인사들은 봉화마을에 내려가면서 첫

▲ 49제가 끝난 뒤 추모비는 청주인근을 떠돌게 된다. 2009년 7월 수동성당에 놓였다가 청원군 농장으로 옮겨진지 2년만에 다시 수동성당에 추모비가 출연했다. 성당 측은 갑작스런 추모비 등장에 불편해했고, 급기야 추모비를 천으로 덮어씌웠다. /사진=육성준 기자
날 분향소를 설치하는 데 참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후 시민단체들이 순번을 정해 봉사했다”며 “지금 천막을 치고 안쳤는가가 왜 중요한 가”라고 반박했다.

처음엔 작은 표지석을 만들려고 했다

결국 첫날 밤 천막을 함께 쳤던 김연찬 교수를 비롯한 일부 노사모 회원들이 추모위원회를 꾸리게 된다. 추모위원장은 김연찬 교수가 맡았다. 일주일간의 분향소 설치기간에 시민들이 1000만원 넘는 부의를 한 것도 어떠한 ‘조직’을 필요로 했다. 천막 값과 경비 등을 정산하고 난 뒤 남은 돈으로는 상당공원에 ‘표지석’을 세우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처음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처럼 ‘작은 비석’인 표지석을 세우고자 했다. 이곳 상당공원에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함께 추모했다는 내용을 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단양에 거주하는 한 시민이 오석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오석과 함께 받침대를 만들다 보니 크기가 커져 1m 65cm가 됐다.

김준권 판화가가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을 그렸고, 최희석 조각가는 어록을 돌에 새겼다. 물론 따로 비용을 받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노무현 대통령 표지석은 시민들과 예술가들의 정성과 뜻이 모아져 완성됐다. 실제 제작비용은 200만원도 채 들지 않았다. 하지만 2m도 넘지 않는 표지석은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당초 상당공원에 표지석을 놓으려고 했지만 보수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보수단체들은 “친인척 비리와 관련해 검찰 수사 도중에 떠났다. 또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살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남상우 전 청주시장은 보수단체의 반발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상당공원 설치 불허입장을 고수했다. 설문조사는 설치 반대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편향적인 조사였다. 추모위원회에서 벌인 조사는 찬성 70%, 반대 30%로 결과가 뒤바뀐다.

그 때부터 추모비는 떠돌게 된다. 49제가 끝난 뒤 추모위원회는 추모비를 2009년 7월 10일 수동성당에 갖다놓게 된다. 하지만 추모위 인사들과 곽동철 신부와의 교감만으로 설치돼 문제가 됐다. 당장 청주교구청에서 철거하라는 강압이 이어졌다. 결국 7월 23일 청원군의 한 농가창고로 옮겨가게 된다. 그 뒤 2011년 4월 12일 다시 수동성당에 추모비가 나타난다.

김연찬 교수는 “4월 14일 문성근 씨가 수동성당에서 강의가 예정돼 있어 그 즈음에 갖다 놓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성당측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판단해 추모위원들과 상의하고 청원농가에서 옮겨왔다”고 말했다.

현재 추모위원회는 김연찬 교수를 포함해 7명이 활동 중이다. 그런데 바로 이들만의 ‘암묵적인 교감’은 항상 문제를 일으켰다. 다시 청주교구청이 발칵 뒤집혔고 철거하지 않으면 임의로 옮기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막말도 오갔다. 수동성당은 추모비를 천으로 뒤집어 씌워놓기까지 했다.

추모위의 자의적인 판단, 문제 키웠다

그러던 중 초창기 추모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이용규 씨가 나서 4월 20일 새벽에 추모비를 청원군 마동 분교로 옮겨 놓았다. 이 과정에서 김연찬 교수를 비롯한 추모위원회는 이용규 씨를 “추모비를 무단 절도 했다”고 규정했다.

이용규 씨는 맨 처음 노무현 대통령 추모비를 만들자고 제안한 인물이다. 이용규 씨는 “지난 2년간 추모비가 떠돌아다니는 과정을 보면서 문제를 일단락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추모위원회가 수동성당에 일방적으로 갖다 놓아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켰다”고 강조했다. 추모위원회는 그간 지역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해 문제를 확대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2년간 소통하지 못하는 지역사회의 갈등을 오롯이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전국 최초로 만든 추모비가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자 광주 호남 미래연대를 비롯한 대전, 수원 등의 몇몇 단체를 통해 추모비를 이양해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차라리 봉하마을에 보내자는 안도 나왔다.

송재봉 처장은 “다른 지역에 추모비를 이양한다면 정말로 충북이 우스워지는 꼴 밖에 안 된다. 지역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소통해야 한다. 최근 서거 2주기를 앞두고 충북추모위원회가 조직돼 해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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