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후죽순 세워진 동상들, 신채호 정신 담고 있는가
국적회복 그치지 말고 ‘사적정비, 선양사업’ 힘써야
허원/ 단재문화예술제전 공동대표·서원대 교수
한 해가 저물어가던 지난해 12월19일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가 주관한 중국답사단은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제15회 단재문화예술제전의 일환으로 치러진 역사퀴즈대회와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들과 학교의 추천을 받은 학생 10명을 포함한 20명이 답사단 멤버였다.

단재선생이 100여년 전 이 땅의 청년들이 영웅과 위인들의 행적을 학습하여 무수한 새 영웅이 되어 국권회복투쟁을 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하여 많은 전기를 펴냈듯이 오늘날 분단된 이 민족, 이 국가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대상도 청년뿐임에야 달리 무슨 이론이 있을까.
답사에 함께했던 한 학생은 고백했다. “단재선생의 발자취를 답사하는 동안 그 분이 나라와 민족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구려와 발해 중심의 새로운 역사관을 내놓은 그 뜻이 그대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로 인해 소아가 아니라 대아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습니다.”
많은 고구려유적들을 보면서 어떤 학생은 “단재가 연구하고 지켜 후세에 까지 계승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재의 연구가 해방 후 체계적으로 이어졌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도 철저한 반박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추론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학생은 “민족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말과 역사 문화가 남아 있는 한 그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누릴 찬란한 미래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책임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뿌리를 알고 나아가 바람직한 역사인식을 가지라고 외친 단재선생님. 자신의 모든 것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바친 단재선생님이야말로 그냥 타버릴 촛불이 아니라 후세에 넘겨줄 강렬한 횃불입니다. 이번 답사에서 눈으로 마주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민족의 활로인 갱도를 뚫는데 절대 불가결한 다이너마이트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학생도 있었다. 100여 년 전 단재의 피눈물 자국이 선연한 그의 망명길을 걸으면서 학생들 심장은 이미 단재의 붉은 피가 들끓는 젊은 단재가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고구려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에 대해서는 적이 뿌듯해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자취를 마음껏 향유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로하였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여 학생들은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향방과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펼치곤 하였다. 중국에서 그들은 단재의 가르침 뿐 아니라 세상을 크고 넓게 보는 시야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짓눌린 감정을 그나마 달래준 것은 역사유적이 없는 백두산 정상이었다. 평소 같으면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면서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으로 잠시도 머무르기 어려운 백두산 꼭대기가 답사단이 도착했을 때는 영하17˜18도에 불과했고 바람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쾌청하게 맑은 날씨에 하얗게 얼어붙은 천지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 덮인 설산은 그곳이 왜 머리가 흰 백두산인가를 실감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학생들을 비롯한 답사단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이제야 알 것 같아. 왜 백두산을 영산이라 하는지. 백두산이 폭발했을 때 분출된 용암이 만든 까마득한 금강대협곡 아래로는 계곡물이 아스라이 흐르고 있었다.
베이징의 단재와 교류한 인사들
1913년 예관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로 간 단재선생은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청년들을 교육하는 박달학원의 역사교사로 있다가 대종교 간부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의 동창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답사하였다.
단재선생이 백두산을 답사할 당시는 산짐승들이 많아 여러 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등정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위험하고 험난한 코스였지만 단재 선생은 민족의 영산이자 한·중 국경지대인 백두산 답사를 기피하지 않았다. 1915년 이희영의 권고로 베이징에 온 단재선생은 3·1운동 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서자 참여하지만 얼마안가 임정을 떠나 베이징으로 돌아와 주로 이곳을 근거로 활동했다.

당시 단재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이외에 루쉰(周樹人), 쩌우쭤런(周作人)형제, 베이징대학 교수로 무정부주의자인 리스쩡(李石曾)과 공산주의자인 리따챠오(李大釗), 군벌장군인 펑위샹(馮玉祥), 만주군벌 쟝쭤린(張作霖)의 아들 쟝쉐량(張學良)등과 폭넓은 교류를 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우당 이회영이 다리가 된 듯하다.
단재선생은 이미 1917~18년 사이 중국의 유명신문인 <북경중화신보>에 많은 논설·시평을 써서 신문의 지가를 올릴 정도였으니 그의 명성은 중국 지식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재선생은 리스쩡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사상에 더 경도된 듯한데 ‘민중은 혁명의 대본영이고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하고 선포한 조선혁명선언은 제국주의 강도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금기를 공개적으로 깨뜨린 선언이자 소극적인 독립운동 방안인 외교론이나 준비론에 일격을 가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천둥 소리였다.
단재선생이 좌우를 막론하고 중국 각계각층의 지도급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한 동기와 배경은 제대로 연구가 되지 않은 미개척분야로 남아있지만 단재사상의 전모를 이해하는데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최근 경북대 김주현교수는 <북경중화신보>에 실린 단재선생의 글로 추정되는 120편 가량의 논설·시평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단재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나 아직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제대로 연구되어야 단재선생이 사망한 후 중국의 유수한 지식인들까지 합세하여 선생의 사상을 국제적으로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단재학사 결성을 시도한 배경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단재, 루쉰 그리고 이영희 선생 
그리고 몸이 불편해 단재제전행사에서 대중강연 같은 것은 못하지만 몸이 회복돼 청주까지 갈수 있게 되면 단재제전에 관계된 분들과 함께 대화하는 자리는 갖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선생은 단재선생과 중국의 루쉰을 크게 존경하고 있었고 루쉰이 영향을 받은 옌푸(嚴復)에게도 영향을 받았다고 언젠가 술회한 적이 있었다.
루쉰은 청말 사상가인 옌푸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발췌하여 번역한 <천연론·天演論>을 통해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이 국제사회에 적용되면 중국은 혁명하여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의식에서 중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전근대적 의식구조의 타파에 진력했던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사회를 미몽에 잠들게 하는 우상을 파괴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이 인간답게 자립 자존할 수 있는 전제라 여겨 열려있는 이성으로 전통과 권력과 지식인의 허위에 끊임없이 도전한 것은 바로 지식인으로서 자기 사회에 대한 철저한 책임의식의 발로로 혼탁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열어놓은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의 스승이었던 단재선생과 루쉰은 거의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해(1936년)에 세상을 떠난 동아시아의 큰 스승들이었다.
단재라는 횃불을 다시 올리자면
국적을 잃은 지 거의 100년만에 국적을 되찾은 단재선생. 2009년 3월 국적이 회복된 선생은 며느님 이덕남 여사의 꿈에 나타나 죄수복을 벗으시면서 ‘나 이제 집으로 돌아 갈란다’ 라고 말씀하시더라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단재선생의 국적회복으로 시작된 단재사상의 진정한 회복을 통해 민족의 앞길을 비추는 횃불을 이어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선생을 어떤 분으로 여겨 왔는가.
선생을 기리는 대표적인 조형물로 여기저기 세워진 동상을 쳐다보노라면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나마 가장 신경 써서 만들어진 동상이 1996년 국민성금에 기초해 조성된 청주예술의전당 앞 동상이지만 한적 두 책을 왼손에 끼고 촛불의 중심에 서 있는 모습은, 열 해를 갈아 칼날은 푸르다마는 쓸 데가 없어 ‘칼아 나는 너를 위하여 우노라’고 기염을 토하던,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투적 사상가로 혁명의 전위에 서고자 했던 선생의 모습으로 보기엔 너무 단아한 선비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 고등학생이 지적했듯이 선생은 이 민족의 촛불이라기보다 횃불 같은 분이셨다.
1988년 과천 서울대공원에 왼손에 책을 든 단재선생의 동상이 세워진 후 대전 어남동의 생가 동상(2000년), 청원 문의 문화재단지의 단재 동상(2004년), 낭성 귀래리 단재사당 옆 동상(2010년) 모두 책을 들거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그 책이 선생이 망명할 때 가져간 유일한 짐인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라면 그것은 얼마지 나지 않아 선생이 극복, 비판한 책이니 그렇게 끼고 있는 것은 선생의 사상에도 이미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선생의 역사연구는 단순한 학자적 연구가 아니다. 2000만의 핏방울, 땀방울마저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흘리게 할 그런 역사연구였다.
1910년 선생이 망명할 때 들른 평북 오산학교에서의 일화다. 교사였던 이광수의 환영사에 답하기 위해 꼬질꼬질한 몰골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비범한 눈빛으로 학생과 교사들을 한번 둘러볼 뿐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이지 그 속에서 타올랐을 그 칼날 같은 결기(決氣), 열혈을 되살릴 동상 제작과 연구를 이제는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당당한 충북, 그 진정한 당당함은 단재사상의 총화에서 기대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국적 회복에서 그치지 말고 이 지역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에 걸맞은 사적정비와 선양사업, 교육 사업이 뒤따른다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