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퀴즈대회 삼수생 민경갑 군의 중국답사기<下>

민 경 갑 운호고 2

충청리뷰가 주관한 단재역사퀴즈대회에 중 3때부터 도전했으나 3번 모두 순위 안에는 들지 못했다. 지난해 참가한 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한 것이 최고의 성적. 그러나 이는 민 군이 자신의 꿈인 참 역사교사를 향해가는 과정이다. 도전은 이미 허망하지 않았으니 그는 단재문화예술제전 추진위의 추천으로 이번 답사에 참여했고, 그의 불타는 꿈에 기름이 부어졌다.

3일째 일정은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날, 백두산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백두산. 사진으로만 보던 천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최근 들어 대폭발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는 불안한 산이기도 한 백두산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폭설로 인해 절반 가까이 눈 속에 파묻힌 숲에 제설차량이 확보해 놓은 길을 따라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백두산 입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또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내부로 들어갔는데, 창밖을 통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백두산의 위엄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꼭대기가 만년설로 뒤덮인 거대한 높이의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사뭇 긴장 되었다. 걸어서 올라간다는 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중간지점에 도착하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이동 수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노모빌’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우리들을 천지까지 태워다 준 스노모빌. 천지까지 힘 하나 안들이고 올라간 놀라운 추억을 남겨준 고마운 녀석들이다.

▲ 중국의 전통 골목길인 ‘후퉁’의 모습. 우리가 찾던 후퉁은 아니지만, 회색벽돌과 중국식 기와지붕을 통해 느껴지는 ‘중국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폭설로 인해 등산로가 묻히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스노모빌을 타고 올라가게 되었는데, 우리가 가는 코스가 처음으로 개장한 코스라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도 걸어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었겠지만, 설원 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백두산 천지까지 올라간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2명이 한 조가 되어 스노모빌을 타고 올라갔는데, 온 몸으로 느껴지는 그 속도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올라갔을 때 천지의 날씨는 상당히 맑았다. 백두산의 날씨는 변덕이 심해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날씨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는 흐린 날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화창한 날씨라서 보는 나 또한 기분이 상쾌해졌다. 단재께서도 이 곳 천지에 오르셨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단재께서는 이곳에서 과연 어떤 심정이셨을지 궁금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민족의 현실을 걱정하셨을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한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며 독립의 포부를 다졌을까?

내려오는 동안에도 놀라운 경치를 보여준 백두산을 뒤로 하고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백두산이 화산활동을 하면서 형성된 금강 대협곡이었다. 백두산이 대폭발(신생대 3기 말~4기 초)을 일으키면서 개마고원 등 다양한 용암대지와 함께 형성된 금강 대협곡은 그야말로 백두산이 만들어낸 그랜드캐니언과도 같은 웅장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빽빽하게 늘어선 침엽수립과 깎아내릴 듯한 협곡, 그리고 까마득한 아래에 흘러가는 강줄기와 강을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까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장관’이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이란 말은 천지와 대협곡을 두고 이른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크기 또한 엄청났다. 아직 해가 떠 있을 오후 4시 정도에 도착한 대협곡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가고 있었다. 숲이나 산이 다른 곳보다 해가 더욱 빨리 진다는 것은 책이나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하루 일정의 대부분을 이 ‘거대한 예술품’으로 가득한 ‘대자연의 미술관’에서 보낸 뒤 우리는 3번째 날의 일정을 끝마쳤다.
-중략(백두산에서 베이징까지의 이동과정은 원고 분량이 많아 생략함.)

단재 베이징 흔적 개발로 사라져

▲ 진스팡지에가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는 증권회사 건물로 보이는 이 빌딩이 들어서 있다. 중국은 역사적인 후통을 제외한 대부분의 후퉁을 재개발하고 있다.
중국 4대 도시 중 하나이자 현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은 여태까지 거쳐 온 도시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갈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10차선’도로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서울보다 몇 배는 많은 것 같았다. 5일차 일정과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일정을 보내는 북경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마지막 일정 당시에 본 ‘자금성’이나 5일차 일정 당시에 갔었던 ‘만리장성’도 있었지만, ‘진스팡지에’와 ‘차오떠우후퉁’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이 두 곳을 답사할 때에는 단재 선생님의 며느님이신 이덕남 여사께서 특별히 함께 하셨다. 현재 암 투병 중이신 여사께서는 악화된 몸 상태 때문에 평소 답사단이 와도 잘 나오시지 않으셨다는데, 학생들이 온다고 하니 특별히 오신 것이다. 그렇게 이덕남 여사님과 함께 우리들은 단재께서 베이징에 처음 도착하셨을 무렵 우당 이회영 선생님 가족들과 거주하셨던 ‘진스팡지에’와 ‘박자혜’ 여사님과 함께 신혼 생활을 지내셨던 집이 있는 ‘차오떠우후퉁’을 찾아 베이징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백탑사 앞에서 내려 두 장소를 찾아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 우리 일행.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스팡지에와 차오떠우후퉁의 흔적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2007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역사적인 후퉁을 제외하고 낡고 노후한 지역에 대하여 시행된 급속한 재개발 정책으로 인해 진스팡지에마저 거대한 빌딩들 속에 모습을 감추고 만 것이다.

진스팡지에라고 추정되는 장소에 들어선 것은 거대한 증권회사로 보이는 빌딩이었는데, 그 주변에서 다른 건물의 흔적을 찾는 것은 힘들어보였다. 하는 수 없이 차오떠우후퉁과 따헤이후 후퉁을 찾아 이동하였지만 그 두 장소도 마찬가지로 찾기가 어려웠다.

주변 지역의 재개발로 인해 골목이 많이 바뀌어 여사님이 기억하시는 위치와 우리들이 아는 장소와도 일치하는 곳을 찾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허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여사님과 함께한 뜻 깊은 시간이었기에 허탈감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여사님과의 짧지만 굵은 소중한 시간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 특별히 답사단과 함께하신 단재의 며느리‘이덕남’ 여사(가운데)와 답사단의 단장을 맡았던 ‘허원’ 교수님(오른쪽).
그 다음날인 마지막 일정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북경의 심장인 ‘천안문 광장’과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자금성’이었다. 당시 북경의 기온이 역대 최저의 기온이었을 뿐만 아니라, 칼바람까지 몰아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스에 매번 나오는 그 거대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던 추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재밌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사령관 동지’사건. 광장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던 기념품 판매 가게에서 인민군 모자를 구입하신 아저씨 한 분께서 완벽한 ‘싱크로율’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신 사건으로 지금 사진으로 보아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가는 모습이시다. 그렇게 우리는 사령관 동지와 함께 천안문 광장을 지나 중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금성을 향해 걸어 나갔다.

명 왕조 영락제 때 건립된 거대한 궁궐인 자금성은 그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궁의 외성의 정문인 천안문을 시작으로 내성 정문인 ‘오문’까지만 해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는데, 그 내부인 태화문 일대와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태화전’은 말 그대로 거대하고 웅장했다. 과연 황제의 궁전이라는 말에 걸맞은 규모였다.

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청 왕조 당시 건륭제가 만든 황위 계승자 확인 방식이었다. 황제에게는 부인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 또한 많았다. 특히 아들들은 다음 황위를 놓고 끊임없이 싸웠다. 이를 염려한 건륭제는 한 가지 재미있는 방법을 창안하기에 이르는데, 우선 차기 황위 계승자의 이름을 2개의 두루마리에 적는다. 그 중 하나는 황제가 항상 몸속에 들고 다니며 다른 하나는 황제의 일상생활 장소인 ‘건청궁’에 있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 쓰인 편액의 뒤에 보관된다. 이 두 개의 두루마리는 황제가 죽은 뒤에 두루마리의 내용을 비교하여 기록된 이름이 같을 경우, 그 사람을 다음 황제로 옹립한다.

역사가 없으면 않으면 미래도 없어

그밖에도 자금성 안에는 수많은 볼거리들이 많았다. 인공적으로 바위를 붙여 만든 정자와 연못을 파고 남은 흙으로 쌓아 올린 인공 산까지. 중국인의 저력을 제대로 상징하는 건물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금성은 우리들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자금성을 끝으로 우리들은 6일 동안 떨어져 있던 그리운 고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6일간의 일정 동안 무려 3000km를 이동하며 단재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한 이번 답사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체험하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시와 시골의 현저히 다른 모습을 통해 앞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에 따른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친구들, 교수님과 함께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고, 중국이 저지른 동북공정이 지금의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들이 동북공정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 다른 나라의 음식과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편으로는 재밌고, 다른 한편으로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답사를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친구들과 동생들, 나보다 앞서 인생이라는 길을 가는 형들, 그리고 함께 답사에 참여하신 다른 분들과의 인연 또한 나에게 있어서 또 다른 추억이었다. 특히 고구려 유적은 역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였다. 오래 전 말을 타고 삼족오 깃발을 휘날리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용맹스러운 고구려 전사들의 터전에 여전히 그들의 함성소리를 간직한 수많은 유적들을 보면서 나는 단재께서 연구하시고 지키며, 후세에까지 계승하고자 하셨던 선조들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더욱 일찍 일어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단재의 연구가 해방 직후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설령 일어났다 해도, 오히려 우리 쪽에서 그들에게 철저한 증명을 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사란 할아버지의 넋이요, 할머니의 혼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들이 역사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누릴 찬란한 미래 역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민족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라도 그들의 말, 역사, 문화가 남아있는 한 그 민족은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 그 말의 뜻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역사가 지금의 세대에서 사라지지 않고, 만대에 걸쳐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정진할 것이다. 나를 시작으로 주변의 친구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의 세대와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다음 세대 모두가 역사의 수호자이자 계승자가 될 수 있도록, 단재가 꿈꾸었던 이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