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민족대표 6인 유족중심 공원 사업

청주 우암산 자락에 충북의 3·1운동을 기념하는 3·1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우리 고장 출신인 손병희, 신석구, 권병덕, 권동진, 신홍식 선생의 동상과 민중운동을 기념하는 횃불이 건립돼 충북의 3·1정신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친일행각으로 시민들에 의해 강제 철거된 정춘수 동상의 부서진 좌대가 14년간 잔해로 남아 있었다. 반목과 질곡 속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진 정춘수 동상은 민중의 손으로 이룬 역사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올해는 3·1운동 92주년이자, 광복을 이룬 지 66년째다. 하지만 아직도 친일청산 문제는 풀지 못한 민족 과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에따라 충청타임즈는 3·1운동 92주년을 맞아 일제 청산의 산 역사교육 현장이 된 청주 3·1공원을 통해 민중운동이었던 충북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해 본다.

◇ 정춘수 동상 강제 철거와 횃불

청주 3·1공원은 1980년 8월 15일 충청북도가 충북의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다.

당시 민간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공원을 건립했으나 유족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되면서 역사적 고증이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공원조성은 1919년 3·1 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한 33인 중 충북 출신 민족대표 6인의 동상 건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동상 제작에는 박석원 조각가(전 홍익대 교수)가 참여해 손병희, 신석구, 권병덕, 권동진, 신홍식, 정춘수 6인의 동상을 세웠다.

하지만 6인의 동상 건립으로 마무리 된 3·1공원 사업이 정춘수의 친일문제와 충북 3·1운동의 의미가 축소됐다는 논란이 일면서 또 다시 지역의 관심거리로 등장했다. 특히 정춘수에 대한 친일논란은 민중운동으로 점화된 충북의 3·1 운동 정신을 훼손시키고, 역사교육의 장으로서의 위상을 세울 수 없다는 지적을 받게 됐다.

이후 1993년 충북역사정의실천협의회에서 정춘수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3·1공원 내 동상 철거 문제를 제기하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충북지역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가 창립된 1994년, 정춘수 동상 철거문제를 공식화했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는 친일청산에 대한 국민의식이 고조되면서 시민단체 중심으로 2월 20일 정춘수 동상에 일장기가 둘려졌고, 3·1절 기념시민대회에선 동상 철거를 시도하며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이후 정춘수 동상철거 공청회와 도지사 면담 등으로 철거에 동의를 얻었으나, 충북도와 청주시가 책임을 전가하면서 철거작업이 미뤄졌다.

때문에 직접 강제철거에 나선 시민단체가 결국 1996년 2월 8일 정춘수 동상을 철거했다. 친일청산 차원에서 시작된 동상 철거는 이렇게 민중의 손에 의해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이후 14년간 3·1공원에는 철거된 정춘수 동상의 좌대만 남아 있었으나 충북의 3·1운동이 민중운동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킨 횃불조각 등이 들어서는 재정비 사업을 통해 2010년 3월 1일 3·1공원 이 역사공원으로 거듭 태어나게 됐다.

◇ 충북지역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으로 국내는 물론 국외로 확대된 민중운동이다. 각 지역에서 민중운동으로 불붙은 3·1운동은 충북 곳곳에서도 전개됐다.

충북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청주에 배포되면서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사전 발각돼 저지당했다. 이후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돼 제천으로 번져갔다. 학자와 농민, 학생이 주도가 됐고, 특히 밤을 이용한 횃불만세 시위를 벌여 인근의 충남, 강원, 경기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도록 했다.

2010년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 이름으로 건립한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충북의 3·1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충북의 3·1운동은 도내 전역에서 50여 차례 수만 명의 민중이 참여해 수백 명의 인명피해를 냈지만 1910년대 후반 의기소침하던 의병운동의 맥을 살려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깃발을 올리도록 함으로써 1920~3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케 한 것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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