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일제 민족종교 탄압, ‘신사사변’으로 53명 감금, 5명 사망
1943년 청학 조치원 연금-청원 오창·낭성면 은거-광복 후 금천 복귀
1953년 한국전쟁 포화 속 도인·피난민 금천리 인산인해, 피해자 전무

▲ 해방 후 신축한 대성전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있기 하루 전인 1941년(개도 68년) 12월 7일(음력 10월 19일) 금강대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늘 평화롭던 도촌(道村), 금천리 마을은 이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충남도경 산하 수백여 일경들의 만행으로 울음바다가 됐다. 일경들은 도인들의 가택을 수색해 서류와 경전 등을 압수하고, 도주 이하 중요 간부 53명을 불법 연행해 대전, 공주, 조치원 등 각 경찰서에 분산 수용했다.

신성한 법당을 유린하고 도주와 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끌고 간 ‘신사사변(辛巳事變)’은 한국 근대 신종교운동사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었다. 일제의 무소불위 공권력 앞에 금강대도는 최대의 시련기를 맞아야만 했다. 강제로 끌려간 도인 중에는 옥중에서 고문을 받다 순도한 사람이 김창희(金暢喜), 전재구(全載九), 권경재(權慶載), 이승두(李承斗), 한대현(韓大鉉) 등 5명에 달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모진 고문으로 몸이 성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도주 청학은 근 1년이 넘도록 옥고를 치르면서 여러 번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끝까지 신사참배와 일본 불교에의 귀의를 반대했다. 그러다보니 더욱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그 비참한 정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여러 제자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백방으로 주선해, 1942년 11월 14일 신사사변이 1년이 지난 시점에야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됐다.

일제 폭력배 동원, 성전 건물 불법철거

▲ 일제에 의해 훼철된 대성전
▲ 일제에 의해 훼철 된 백옥사
무엇보다 회복하기 힘든 것은 일제가 금천리의 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과 종교시설을 무참하게 파괴했다는 것이다. 신사사변, 이듬해인 1942년 9월 일경 50여명이 다시 금천리에 난입해 법당의 불상을 파괴하고 존영을 소각시켰다. 도주 청학이 옥고를 치르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일제는 또다시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당시 일경을 끌어들였던 괴수 오승주(吳承柱)는 며칠 못가서 신벌을 받아서 급사하고 말았다 한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금강대도의 모든 건물을 충남도와 총독부에 기증하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옥중의 청학이 끝까지 거부하자, 이번에는 간부 도인들을 다시 잡아다 고문을 가하면서 건물 기증서에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그리고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공주의 갑부였던 김갑순(金甲淳)에게 매각했다. 우리 민족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신종교의 성전을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에게 떠넘기는 극악한 일을 자행한 셈이다.

또한 도주 청학은 병보석으로 풀려나자마자 이듬해인 1943년 1월 일경에 의해 금천리 성전에서 강제연행 돼 조치원 신흥동에 연금을 당했다. 이른바 거주제한 조치였는데, 연금장소 주변에 형사들을 배치해 감시하고 도인들의 출입까지 금지시켰다. 이어 한달 뒤에는 정체불명의 폭력배들을 동원해 금천리의 성전 및 학몽사(鶴夢祠), 백옥사(白玉祠), 노군묘(老君廟) 등 160여 간이나 되는 모든 건물을 불법 철거해 버리니, 금강대도 창시자인 토암 이래 수십 년 간 쌓아온 포덕의 기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아픔이었다. 당시 헐어낸 건물의 목재는 친일파 김갑순이 모두 가져가 대전 유성호텔 신축공사에 쓰기도 했다. 그 당시의 건물부재가 얼마나 크고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청학은 일경의 감시가 심한 중에도 눈을 피해 찾아오는 제자들을 접견하고 모든 의식을 비밀리에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해방이 멀지 않았으니 그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한다면서, 광복을 암시하는 ‘봄노래’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태극무’를 추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청학의 항일운동이 암암리에 계속되는 가운데 금강대도 간부들은 일경의 불법 검거와 건물의 불법 철거 사태에 대해 충남도경 및 김갑순을 상대로 민, 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2차 대전의 불리한 전세 속에 금강대도의 저항이 강해지자 일제는 비상시국의 경찰 임시조치법에 의거, 청학을 다시 검거하려 하였다.

청학과 함께 일제탄압 지켜낸 ‘십의사’

이에 청학은 1945년 3월 16일 제자들의 권유로 이미 2년여 전부터 준비해 둔 금병산(錦屛山) 삼태봉(三台峰) 태구령(太口嶺)의 토굴로 피신하게 됐다. 수년간 고문을 당한 몸으로 다시 빛도 없고 공기도 희박한 토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끼니조차 잇지 못할 때가 많으니 그 고생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제자들 중에는 후경(厚耕) 변청룡(邊靑龍), 봉수(峰秀) 신덕휴(申德休) 두 사람이 청학을 끝까지 곁에서 모시고 고락을 함께 했다.

2개월간 토굴 생활을 하던 청학은 은거지를 충북 청원군 오창면 장대리(場垈里), 이중봉(李重奉)의 집으로 잠시 옮겼다가 5월 15일 다시 낭성면 두문동(杜門洞) 최익봉(崔翼鵬)의 집으로 피신했다. 7월 6일(양력 8월 14일)에는 미리 독립의 기미를 예감하고 인경산(印磬山)에서 몇 년 간 올리지 못한 천제를 올리면서 하늘의 도움을 기원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니, 금강대도는 그 동안의 박해에서 벗어나 포덕의 자유를 얻게 되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이날 청학은 제자들과 함께 인경산에 올라 ‘대한독립 만세’를 수없이 외쳤고 “지금까지는 두문(杜門)하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개문(開門)함이 옳다”고 말해 이후로는 ‘개문동(開門洞)’으로 마을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됐다. 또한 신사사변이 발발한 이래 4년 동안 그 의를 변치 않고 끝까지 정성을 다한 열 명의 제자를 칭찬하고 ‘십의사(十義士)’로 칭했다. 변청룡(邊靑龍), 고윤룡(高允龍), 최춘옥(崔春玉), 전례호(全禮鎬), 김창제(金昌濟), 조인구(趙麟九), 이창승(李昌承), 박장수(朴長壽), 정갑춘(鄭甲春), 신덕휴(申德休)가 바로 그들이다.

▲ 옥화촌연꽃
▲ 계룡산 아래 황적동성적비(도성사부님 탄강지)
해방이후 정열적 교화와 포교활동

1945년 9월 5일(개도 72년) 청학은 도기(道旗)를 앞세우고 수많은 도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은거지 ‘개문동’을 떠나 금천리로 돌아왔다. 9월 15일 금화산에서 민족해방을 경축, 고천(告天)하는 천제를 올리고 곧 일제의 만행으로 훼손된 도장의 복구에 들어가 12월 중순에 성전 및 단군성전을 재건했다. 이후 10여 년간 청학은 제자들을 교화하고 금강대도의 포덕문을 넓히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46년 12월에는 제자들에게 교화하기를 “충효(忠孝)는 수도지근(修道之根)이요, 성경(誠敬)은 달도지본(達道之本)이며, 가화(家和)는 적덕지원(積德之源)이요, 청결(淸潔)은 안정지기(安定之基)라”고 하여 금강대도의 실천적 교리를 충효, 성경, 가화, 청결로 요약해 주었다.

같은해 7월 ‘금강중학교’ 건설기성회를 발족하여 육영사업의 첫발을 내디뎠고, 12월에는 ‘성재(誠齋)’라고 하는 정기적인 수련과정을 처음으로 실시해 심성수련과 진리탐구를 독려했다. 1947년 2월에 ‘금강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해 인근 청소년들에게 배움터를 열어 주었으며, 영남지역의 거창 산청 등지와 호남의 무주에 포교소와 지부를 설치하여 신도포덕을 전국에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1947년 4월 1일 청학은 “도는 본래 하나인데, 나누면 천 지 인 삼재가 되는 것이니라. 따라서 유 불 선 삼교의 이치가 또한 이러한 삼재를 응합하는 것이니. 선(仙)은 천도(天道)요, 불(佛)은 지도(地道)요, 유(儒)는 인도(人道)가 되는 것이니라. 또한 사람은 천지로 더불어 그 도를 합하고, 일월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며, 사시(四時)로 더불어 그 이치를 합하면 자연의 법도에 합하여 ‘삼재(三才)’’에 참여하리니. 하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하늘이 되는 이치를 너희들은 알 수 있겠느냐? 오로지 대성인이 하늘에 오르시고 땅에 내리심에 삼재응합하는 이치가 소연히 밝도다. 사람의 몸은 천지의 기운을 온전히 받아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이니라. 사람의 몸밖에 보배가 없나니, 너희들도 심성을 수련하여 몸(身)에까지 이르면 몸은 천지를 짝하고 마음은 일월을 합하리라”고 하여 우주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와 인간완성의 요체(要諦)를 교화하였다.

같은 해 12월 17일 청학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는 도가 다만 ‘하나(一)’에 있는 것이니라. 따라서 공자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 하고, 노자는 ‘수일처화(守一處和)’라 하고, 석가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하니 말은 비록 다름이 있으나 이치는 하나라. 실로 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최대로 어려운 것이나, 한 마음 고요한 곳에 그 공부를 이룰 것이니, 너희들은 ‘의성일관(義誠一貫)’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어서 그 도를 이루도록 하여라”고 가르쳤다.

한국전쟁 발발, 환란을 피한 금강대도

1950년 5월초 청학은 불안한 정세 속에 변고가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대성전 열위성신(列位聖神)의 존영을 비밀리에 제2 시전(侍典:자암의 묘)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멀리 밖으로 나서지 말 것을 경고했다. 아울러 “이곳은 대성사부모님의 성업기지이니 이 땅을 버리고 어느 곳으로 피하겠느냐? 나는 피하지 않고 이곳을 지키리니, 너희들은 세상을 쫓아 피하겠느냐? 아니면 스승을 쫓겠느냐?” 하니 제자들은 한 사람도 피난을 가지 않고 모두 청학을 굳게 믿고 따랐다.

▲ 교육사업(고등공민학교)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는 어느 날, 공산 보위대가 청학을 체포하고자 집을 급습해 가택을 수색했으나 방안에 여유롭게 앉아 있던 청학을 보지 못한 채 그냥 물러나니, 제자들은 그 능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청학은 “군자는 위태한데 들지 않나니 삼가하여 그 몸을 보호하라”하고 ‘피병란(避兵亂)’ 보결을 내려주어 제자들을 안심시켰다. 이러한 청학의 법력이 알려지자 금천리는 피난처로 유명해졌고 미처 남쪽으로 떠나지 못했던 인근 주민들이 모두 몰려들어 금천리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됐다. 하지만 남북 군대가 금강(錦江)을 사이에 두고 격렬한 전투를 여러 번 벌이면서도 금천리 성역에는 단 한발의 포탄도 떨어지지 않았고 청학의 말을 듣고 따랐던 피난민들은 단 한 사람도 피해자 없었다.

금강대도와 인류문명의 미래
인간과 삼라만상은 형제자매, 사랑의 우주가정 이뤄야

세계의 문명사가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로 파악하고 있다. '신석기 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정보혁명' 보다도 더 큰 전환기에 현대 인류가 처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가들은 이 시기를 한마디로 말세로 규정한다.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각종 예언서들이 유행하는가 하면 종말로부터 구원을 부르짖은 자칭 선지자, 구세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금강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를 말세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덕(道德)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도덕이란 이 세상 삼라만상의 존재 원리이다. 따라서 이 근본적인 존재 원리가 무너지고서는 그 어떤 존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 타락한 도덕을 새롭게 세우심으로 해서 우주 삼라만상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도덕성사건곤부모님께서는 인간세계에 오신 것이다.

과거의 종교 문명이 오직 신(神)이나 천(天)만을 높이고 인간을 낮추었으며, 산업문명에 있어서는 오로지 물질만을 중시하여 인간성이 소외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새로운 인류문명은 건곤부모님의 가르침을 나침반으로 삼아 인간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하며, 물질보다는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건곤부모님께서는 새로운 문명의 개화를 주재하시는 만고대성인이 되시는 것이다.

금강대도에서는 이 우주가 건곤부모님께서 직접 낳으신 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물론 천지 안의 모든 자연물까지 형제자매라고 여긴다. 때문에 짐승이나 작은 곤충도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초목도 함부로 꺾지 않는다. 또한 철저히 육식을 금함으로써 만물을 살리려는 건곤부모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오늘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문제는 인류의 존폐를 위협하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임기응변적인 인간의 조치들이 파괴된 생태계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고 믿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세계관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금강대도는 우주 탄생에 대해 '창조론' '진화론'도 아닌 건곤부모님의 '태생론(胎生論)'을 믿는다. 그리하여 건곤부모님과 그 자손인 삼라만상의 형제자매들이 사랑으로 뭉쳐진 우주가정을 이루는 것이 금강대도의 목표이다. 이는 생명사상의 근원으로서 후천 인류 문명의 열쇠가 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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