땔감·먹을거리 준비에 집집마다 바쁜 가을철
은행나무·감나무 등 아낌없이 주는 나무보고 감동

현재 문의면에서 ‘마불갤러리’를 운영하고 명상과 영문번역, 글쓰기를 하며 부지런히 살고 있다. 번역서로 ‘42장경’ ‘그대 가슴속에 꽃을 피워라’ ‘법의 연꽃’ 등 다수가 있다. 올해는 특히 자연과 대화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쓴 ‘선우야, 바람보러 가자’를 펴냈다. 앞으로 이경옥씨는 본지에 ‘산골이 좋다’를 연재할 예정이다.
간밤에 된서리가 내렸나보다. 은행잎은 더 샛노래지고 닭장위로 올라간 호박덩쿨은 사그라들어 이제 생을 다한것 같다. 가을 식탁을 지켜주던 텃밭의 가지, 깻잎, 고추, 토마토 등은 다 들어갔고 배추와 무만 남았다.
이 땅에 오랫동안 적응해 온 배추와 무는 생명력이 더 강한가보다. 그래도 더 추워져 땅이 꽁꽁 얼기 전에 배추와 무도 뽑아서 저장을 해두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 한겨울 따뜻하게, 그리고 한가롭게 지내려면 지금 분주히 움직이고 준비를 많이 해놓아야 한다. 가을의 만찬을 다 즐기기도 전에 벌써 겨울이라니!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해거름이 점점 빨라져온다. 산골마을은 해가 지면 갑자기 추위가 몰려온다.
그래서 겨울 준비로 가장 중요한 것이 땔감을 준비하는 일인데, 올 겨울은 남편이 바빠지니 땔감을 사서 써야할 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그동안 10년이 훨씬 넘도록 땔감을 스스로 준비해왔노라고 자랑해왔지만 지금은 작품준비로 바쁘니 어쩔 수 없다.
은행 알 줍는 재미 아세요?
산골에서 겨울을 잘 나려면 먹을거리 준비가 중요하다. 마을 집집마다 나물도 말려놓고 콩이며 깨, 팥등 농사지은 온갖 잡곡들을 털고 까부르고 추스르시며 가을 내내 분주하다. 곶감도 주렁주렁 걸어놓고 호두와 은행도 털어서 껍질을 까고 씻어 햇볕에 말려놓아야 겨우내 먹는다. 다람쥐들도 이것 저것 제 음식을 부지런히 나르며 겨울준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늦은 가을 이맘때쯤이면 시골 마을은 곡식털고 남은 찌꺼기를 태우는 냄새가 여기 저기 난다. 시골의 가을냄새다.

서리가 내린 후 은행 알을 주워 겉껍질을 까서 즙으로 짜면 기관지에 아주 좋은데 냄새도 향긋한 것이, 은행 특유의 구릿한 냄새가 별로 없다. 해마다 은행을 털면서 우리는 부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북히 떨어진 은행 알을 줍는 일은 재미도 있고, 단순해서 모든 시름을 잊게 할 정도이다. 가끔 다 못 주은 은행 알은 봄에 낙엽속에서 자연 보관된 채로 발견된다.
은행은 알을 까고 씻어서 햇볕에 말려 놓으면 겨우내 밥에다 넣어 먹기도 하고 구워서 간식으로도 먹는다. 잘 구은 은행 알은 투명한 연두빛이 되는데 어찌나 색이 고운지 먹을 때마다 에메랄드 보석이라고 감탄을 한다. 그런데 은행을 일일이 손으로 까는 일은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대게는 은행 알을 자루에 담아 물에 넣고 비비면 쉽게 껍질이 떨어져 나오지만 물을 오염시킬까 걱정이 되어 일일이 손으로 까서 즙으로 짜고 남은 찌꺼기는 거름으로 쓰는 것이다. 노랗게 된 은행나무 잎은 방충기능이 있어 주워다가 집 주변에 뿌려놓으면 벌레들을 예방하기도 하니 겨울나기 준비 중의 하나가 된다. 겨울엔 지네나 노래기 등이 따뜻한 방안으로 자꾸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는 곶감
감꽃이 빠져 바닥에 수북히 쌓일 때도 참 좋다. 8월이면 땡감을 따서 염료를 만들어 옷감에 물을 들이거나 남편의 종이 작업에 쓰기도 한다. 10월이면 산까치나 말벌들이 건드린 감이 먼저 익어 붉은 홍시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지금처럼 찬 바람이 불고 온도가 내려가면 잎이 떨어진다. 커다란 잎새에 단풍이 지는 것도 예쁘지만,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빈가지만 남은 감나무에 감이 매달려 있는 모습은 황홀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붉은 홍시가 어우러진 모습은 동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탱탱한 감을 소금물에 담가 장아찌를 담거나 곶감을 만들어 햇빛이 잘드는 양지쪽에 매달아놓고, 남은 감중에 허드레 감은 감식초 담고 좋은 감은 항아리에 채곡채곡 재워놓으면 겨울 간식이 된다. 든든한 겨울 준비중 하나이다. 곶감은 눈으로 먼저 먹고 맛으로 먹는 것이다. 항아리에 채워놓은 감은 입에 침이 고이게 하고, 목으로 넘어가는 차가운 감의 단맛 한 개면 잠시 허기를 면하기도 한다. 곶감을 매달아놓고 말랑말랑할 때 가끔 한 개씩 빼먹으면서 남편이 아이에게 묻는다. ‘선우야,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니, 곶감이 더 맛있니?’하고 물으면 아이는 ‘곶감’하고 대답하곤 한다. 곶감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하는 옛날 어르신들의 말씀을 실감한다.
그러고보면 나무는 아낌없이 준다. 봄에는 초록빛 생명의 기운을 온 대지에 뿌려주고 여름에는 무성한 나뭇잎으로 그늘과 바람을, 그리고는 이제 무수한 열매들을 나누어준다. 바람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샛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은행알들이 후둑후둑 떨어져 쌓이는 모습은 나눔의 절정이다. 온 생명을 다해 만든 열매들을 나누어주며 나무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일까?
나뭇잎마저 다 떨쳐버리고 빈 가지에 붉은 열매만을 간직한 채 서 있는 감나무는 고요한 기도이다. 가끔 새들이 날아와 윗가지에 남아있는 홍시를 쪼아먹기도 하고 빈 가지위에 앉아 있기도 한다. 주고 또 주는 나무들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