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목사 생일잔치 틈탄 반란군 무장(武將)들 살해
표충사에 위패모신 무장, 창의병 역사기록은 전무

청주지역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보면 동학농민혁명의 한축인 북접의 큰 전투가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 탈환, 이인좌의 반란군 진압 등에 민초들이 떨쳐나와 침략군와 불의에 맞서 저항했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민초들의 이같은 저항의 기록은 소홀한 반면 당시 공권력(관군)의 공적에 대해서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청주시 관내에 위치한 표충사(表忠祠·상당구 수동), 무신창의사적비(戊申倡義事跡碑·상당구 산성동)를 배경으로 청주 역사기록의 허와 실을 점검해 본다.

조선시대 영조 재위시 벌어진 이인좌의 청주반란은 노론과 소론간의 당파싸움에서 비롯된 권력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경종은 재위 4년만에 36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왕세제 연잉군이 22대 영조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이 득세하게 됐고 소론은 경종의 독살설 등을 주장하며 저항하다 처형 유배됐다.(을사환국) 극심한 당쟁속에 영조는 탕평책을 내세워 조정의 안정을 꾀했으나 즉위 4년만인 1728년(무신년 3월) 소론인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켰다.


▲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위치한 표충사 전경(위) 상당산성 잔디마당 입구에 세운 무신창의사적비(戊申倡義事跡碑)
이인좌의 가계는 선조때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명문가였다. 그는 괴산 청안향교에 배향되었고 이종 사촌 권서봉은 청주 사람이었다. 이인좌는 이같은 청주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양과 3남의 연결고리인 청주에서 거사를 꾸미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주와 영남에서도 사전밀약한 동조세력이 봉기해 한양으로 쳐들어가 왕을 쫓아내고 밀풍군 탄(坦)을 새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이인좌는 청주 권서봉을 내세워 힘이 좋은 장사 신천영, 상당산성의 무후 박종원 등을 끌어들였다. 신천영이 살고있던 월오동 동막골 깊은 산속에 대장간을 차리고 밤낮없이 병장기를 만들고 장정들을 불러모아 훈련까지 시켰다. 마침내 청주 목사 박당의 생일이자 장날인 3월 15일을 거사날로 잡아 상여꾼을 가장해 만장을 휘날리며 이동한뒤 까치내쪽 숲속에 은신해 밤이 되길 기다렸다.

한편 성내에서는 청주 목사의 생일잔치가 벌어져 이봉상 병마절도사, 영장 남연년 등 치안을 책임진 관리들까지 술에 빠져있었다. 해가 지자 신천영을 중심으로한 반란 민간인들은 병장기를 몸에 감추고 내통한 관군이 미리 성문을 따주어 청주성은 쉽게 점령됐다. 또한 한패는 것대산 봉화대를 접수했고 산성까지 장악하게 됐다.

술에 취해 잠이 든 청주목사 박당은 느닷없는 반란 기습에 놀라 담을 넘어 달아났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이봉상, 영장 남연년을 비롯해 비장 홍림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한채 치안을 책임진 무장들이 잠결에 비명횡사한 것이다.

청주성을 장악한 이인좌는 대원수로 자칭하며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했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였다. 또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청주성에서 밀려나와 상당산성에서 패하였다. 이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 권서봉은 생포돼 처형됐다.

표충사 3인의 충절, 해석 달라
결국 이인좌는 청주반란 10여일만에 참수됐고 청주성과 상당산성도 민간 주축으로 조직된 창의군에 의해 되찾게 됐다. 하지만 창의군의 공적에 대한 기록은 변변치 않고 반란 당시 죽임을 당한 청주병마절도사 이봉상을 비롯한 남연년, 홍림은 절개를 지켜 순절했다며 영조 7년 그 충절을 기리는 사당 ‘표충사’를 세우게 된다. 또한 이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은 이인좌의 난에 순절한 공적으로 아산시 음봉면 이순신 장군 묘소 옆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일부 지역 향토사 간행물에는 ‘이인좌의 난’에 대한 기술에서 반란군이 ‘항복하여 협조하라’고 회유하자 병마절도사 이봉상은 “역적놈들아, 충무공의 가문이 너희 도적놈에게 굽혀서 영화를 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기개를 보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영장 남연년도 “너희 개새끼 무리들을 쫓아 반역을 하겠는가”며 일갈했다는 것. 실제 이같은 임종 상황을 조정에 보고해 ‘무신감란록(戊申勘亂錄)’에 유사하게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병서의 ‘야사로 보는 조선의 역사2’에는 당시 이봉상이 기생과 함께 잠을 자다 알몸으로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반란군에 사로잡혀 죽은 상황이 순절(殉節)로 미화된 것은 청주목사 박당이 용케 도주해 살아남은 것과 대비시킨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반면 청주성이 함락된 이튿날 서울서 내려온 창의사 박민웅을 중심으로 지역의 선비들이 힘을 합쳐 창의군을 구성하게 된다. 이들은 먼저 청주성을 사방에서 공략해 회복하고 상당산성으로 진격해 반군의 우두머리였던 신천영 등 20여명을 사로잡아 처형하고 청주반란을 사실상 평정했다. 이때가 청주성 함락 10일만인 3월 24일이었다. 당시 영조는 창의군에 가담한 14명의 선비들에게 양무원종일등공신의 녹훈을 내렸으나 공훈록에 빠진 이들이 많아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왜병으로부터 청주성을 탈환한 것도 청주의 의병이고 내란에서 청주성을 구한 것도 창의병이라는 점을 감안해 그 연원을 기록한 상징물을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마침내 지난해 2월 청주시의 지원으로 상당산성 잔디마당 입구에 무신창의사적비(戊申倡義事跡碑)가 건립됐다. 충북대 임동철 총장이 3000자에 달하는 비문을 완성했고 순천 박씨 8대조 박지후 7대조 박용한, 박광한 등 창의군 선조를 모신 청주향교 박영순 전교 등 7명의 추진위원들이 결실을 보게 됐다.


▲ 표충사에 있는 기생 해월의 열녀각(사진 위) 우암산 중턱에 위치한 열녀 해월의 묘비석에는 태극기 문양까지 넣어 이채롭다.
반란속에 운명이 뒤바뀐 두 명의 기생


이인좌의 난을 기록한 문서에는 두 명의 관기(官妓)가 등장한다. 한명은 반란군에 가담했고 다른 한명은 그들에 죽임을 당한 비장 홍림의 애첩이었다.

반란군쪽에는 청주목의 월례(月禮)가 가담했는데, 목사 박당의 생일잔치에서 병마절도사 이봉상 등에 술을 권해 긴장의 고삐를 늦추는 역할을 했다. 또한 잔치가 끝나고 청주목의 고관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한후 반군에 신호를 보내 제압할 수 있는 타이밍을 제공했다. 하지만 관군이 반란군을 진압된 이후 행적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당시 관련자에 대한 철저한 색출작업에 비춰 창의병 또는 관군에게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관기의 신분으로 공권력에 대항하는 반군에 적극 가담한 것은 실로 대담한 일이었다.

반란군에 비명횡사한 홍림은 병마절도사를 수행하는 비장이었다. 그는 비장의 신분으로 애첩 해월(海月)을 두었는데 피살직후 해월이 반군에 청하여 홍림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지냈다는 것. 또한 뱃속에 있던 유복자를 낳아 7세까지 키웠으나 전염병으로 갑자기 숨졌고 이를 비관한 해월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먼저 간 남자를 따라 죽었다며 열녀(烈女)로 추앙됐고 표충사에 열녀각을 세우는 한편 우암산에 묘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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