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에 있는 한 공장에 그와 함께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러서 인사를 나누고 커피를 나눠 마실때쯤 노조 간부 한 분이 잠깐 사무실 밖으로 나오란다.

그 노조간부가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저사람(같이 동행했던 그 사람) 노무사 맞아요." 홍두깨 같은 질문에, 간단하게 "네"라고 답했다. "왜요"하고 다시 되물었다.

그가 답한다. "그래도 노무사인데 옷차림이 왜 그래요. 신발은 창이 벌어져서 양말이 다 보이고."

나는 그냥 웃었다. 그 노조간부의 지적대로 같이 동행했던 노무사의 차림새가 꼭 그랬다. 양복도 입지 않고, 옷차림은 허름하고 신발은 창이 벌어지고.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상담을 마칠 때쯤, 그 간부가 그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청주로 오는 차 안에서 그가 난감한 표정이다. 아까 그 노동조합 간부가 벌어진 구두 밑창을 접착제로 붙여주었는데 양말이 늘어 붙었단다.

어느날 호죽노동인권센터 사무실에 있는 그의 옷에 청테이프가 붙어 있다. 찢어진 부위에 청테이프로 임시 처방을 한 것이다. 그때, 그는 20일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다. 거대기업으로부터 왕따, 집단차별에 의해 해고된 한 여성의 '부당해고 구제신청 서면'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그의 집념은 20일 넘는 밤샘 작업을 통해 400여페이지(거의 소설책 분량이다)의 서면을 완성했다.

그리고 노동위원회로부터 그녀에 대한 해고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이끌어 냈다. 이 결정이 나오고 나서 그는 3일간의 휴가를 내고 겨울 지리산을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또 다른 노동자의 문제를 가지고 언제나 그렇듯 씨름하고 다닌다.

40대 중반의 그도 한때는 직원을 고용하며 번듯한 사무실을 운영하며 일정이상의 소득을 올렸던 개업노무사였다. 그랬던 그가 '회의와 고통'을 느꼈다 했다.

'타인의 고통'을 바탕으로 소득을 올리는, 그리고 소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물질만능주의'적인 삶에 커다란 회의를 느꼈단다. 그리고 40대의 나이에 가진 것을 버리고, '호죽노동인권센터'에 새둥지를 틀었다.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젖히니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왔다고 했다.

어느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당신이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그가 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것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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