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든든한 버팀목, 통일·시민운동 산파역도

‘기업화, 대형화 되고 있다’는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의 사회참여는 매우 폭넓고 깊이 있게 이뤄지고 있다.

사회복지의 절대적인 비중을 종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와 천주교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 노영우 목사.
이와 함께 충북지역 목회자들이 크게 기여하고 족적을 남긴 분야가 민주화운동이다.
군사정권이 서슬 퍼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70~80년대 이들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선구자로서 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통일운동의 구심이 됐으며 특히 시민단체 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 불모지 개척, 故 정진동·김정웅·노영우 목사

목회자들의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故 정진동 목사다. 정 목사는 1972년 청주에 도시산업선교회를 세우며 지역에 노동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도시산업선교회는 4·19혁명 이후 최초의 지역 민주화 운동의 구심이 됐으며 신흥제분사건과 청주시청 미화원 임금체불 사건 등 70년대 굵직한 노동 관련 현안을 이끌었다.
지난해 정 목사의 작고 후 지금은 조순형 전도사가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고 있다.

1978년 명암교회를 개척한 김정웅 목사도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나무였다.
7080 운동권 출신 인사들 중 김 목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김 목사는 공안의 탄압으로부터 민주화 일꾼들을 지키고 후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정진동 목사가 빈민과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면 김 목사는 노영우 목사와 함께 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의 구심이었다.

광주항쟁을 거치며 민주화운동이 활발해져 충북지역에도 관련 단체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는데 충북민주운동협의회, 민족민주운동연합, 민주주의민족통일충북연합 등 지역 민주화 세력의 맏어른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87년 6.10항쟁이라는 역사적인 집회를 앞두고 철야기도를 하느라 연락이 두절된 것을 경찰에 연행된 것으로 오인해 실랑이를 벌였다는 얘기와 삭발한 채 주례를 섰다는 김 목사와 관련된 일화가 아직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노영우 목사는 청주남교회에 부임하자마자 87년 6월항쟁을 맞으며 줄곧 지역 민주화와 시민운동에 헌신해 오고 있다.
충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협) 탄생을 주도하는 등 자신 뿐 아니라 교회의 사회참여도 적극 독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농민·문화 등 부문 운동의 길 제시

故 정진동·김정웅·노영우 목사가 암울했던 시절 커다란 나무그늘을 제공했다면 80년대 30대였던 강진국, 차윤재, 이도형 목사 등은 목협 실무자 트리오라 불리며 사회참여의 폭을 넓혔다.

강 목사와 이 목사는 1988년 충북농민선교목회자협의회(농목)을 조직했으며 이후 농민조직으로 탄생한 충북기독교농민회에서도 차흥도 목사와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농민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차윤재 목사는 1984년 실무자로 활동하던 청주YMCA와 갈등을 겪을 정도로 개혁성이 강한 목회자였다. 이후 청주시 사창동에 푸른교회를 개척하면서 각종 단체 임원으로 활동하며 젊은 목회자로서 커다란 열정을 보여줬다. 또한 노동문제상담소도 운영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기여했다.

특히 이들의 활동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87년 5월 청주제일교회 시국기도 행사에서 강 목사가 눈물을 흘리며 삭발, 이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며 유명세를 탔다. 이를 계기로 경찰의 감시대상이 돼 당시 정보형사가 강 목사가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중 이도형 목사는 서울로 옮겼고 차윤재 목사도 마산YMCA 사무처장으로 일하는 등 지역과의 인연이 끊긴 상태다.

이밖에 한사석 목사는 87년 6월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충북민주운동연합도 이끌었다. 김창규 목사도 시인으로 문화운동연합과 민예총, 충북작가회의 탄생에 기여했다.

또한 이창언, 고은영 목사가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여성, 김태종 목사가 생명운동에 적극 나서는 등 많은 목회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대가 목사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충북참여연대 공동대표, 민주평통 부의장 노영우 목사

시민사회운동 일선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목회자가 노영우 목사(63·청주소망의집 원장)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사)남북누리나눔 공동대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6.15공동선언실천충북본부 상임대표 등이 노 목사가 맡고 있는 굵직한 직함들이다.

노 목사는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자 마자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선구자가 돼야 했다.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그저 종교인으로서의 양심과 시대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폭압에 그나마 종교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이런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인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지만 권력이 이를 유린하고 탄압하는 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지역 민주화운동의 버팀목이었던 노 목사는 90년대 들어서면서 통일운동과 시민운동으로 시야를 넓힌다. 청주시민회 탄생을 주도했으며 통일 관련 사업에는 지금도 팔을 걷어부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충청북도가 제정한 ‘남북농업교류협력에 관한 조례’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충북 민주평통과 미국 5개 주를 관할하는 시애틀 민주평통의 자매결연을 이끌어 내는 등 민관을 아우르는 통일운동을 이끌고 있다.

2006년 청주소망의집 원장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아직도 노 목사의 뇌리에는 목회자의 양심과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과거 30여년을 되돌아 보며 자신의 버팀목이기도 했던 이쾌재 목사와 청주 제일교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팔순에 가까워 은퇴하셨지만 이쾌재 목사님은 당시 사령탑이셨다. 제일교회를 시국기도회나 집회장소로 제공하는 것 뿐 아니라 수많은 활동가들의 요람이었다. 목회자가 있어야 할 곳은 예배당 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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