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이 세운 묘표·道費 건립 사적비 철거 방치
청원군·기념사업회, “나중에 별도의 장소에 전시”
단재사적비 교체 논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오던/ 한 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도종환 시인은 1985년에 발표한 詩 ‘고두미 마을에서’를 통해 1936년 2월21일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돼 오동나무함에 들려 고향으로 돌아온 우국지사 단재의 귀환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이 그토록 바랐던 해방을 맞이한 지 60여년이 흘렀음에도 선생은 아직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선생은 순국 이틀 뒤인 2월23일 뤼순에서 화장돼 이튿날 오후 서울에 도착한 뒤 청주로 운구, 묵정리 신백우 선생 댁에 하루 봉안한 후 때가 때인지라 고향인 귀래리 옛 집터에 암장됐다. 하지만 ‘2004년 수맥이 흘러 봉분이 14차례나 무너졌다’며 후손들에 의해 파묘된 이후 임시 이장돼 가묘(假墓)로 방치되는 등 묘역 조성과 관련한 갈등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단재기념사업회와 종중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갖고 묘역을 성역화 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져 올해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했지만 이 과정에서 1972년 도민의 뜻을 모아 세운 사적비와 1941년 한용운 선생 등이 세운 묘표비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문중사(門中史)에 치우친 새 사적비로 교체돼 또 다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민족의 단재인가, 아니면 문중의 단재인가’라는 되물음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있는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묘소가 파묘(破墓)된 지 3년 8개월여 만인 지난 5월에 새롭게 단장됐다. 새로 단장된 선생의 묘는 봉분 높이가 2.5m, 지름은 약 8m에 달해 초라했던 최초의 묘소나 가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용이 당당하다. 또 묘 앞에는 상석과 선생의 일대기가 적힌 비석, 석물 등이 새로 설치됐다. 지난해 말 기념사업회가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 크기와 형태로 봉분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 등이 대부분 받아들여진 것이다.
단재 선생의 묘소는 2004년 9월22일 며느리 이덕남씨 등이 “묘소 아래로 수맥이 흘러 봉분 등이 훼손되는데도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며 인근 지역으로 이장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파묘돼, 원래의 묘소로부터 20m 정도 떨어진 생가 터에 가묘가 설치됐다.
이후 부근의 새로운 장소에 묘역을 조성하려 했으나 토지매입 등에 실패해 결국 가묘가 있는 자리를 성역화 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청원군은 내년에도 2억5000만원을 확보해 화강석 계단과 배수로를 조성하고 묘소 주변에 잔디와 나무를 심는 등 조경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예정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1972년 단재의 장남인 수범(1991년 작고)씨가 지역의 인사들과 뜻을 모아 도비로 세웠던 사적비와 1941년 한용운, 오세창 선생이 세운 묘표비가 철거돼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72년 사적비는 현재 해체된 채로 사당 초입 공중화장실 인근에 검정비닐에 덮여 방치돼 있다. 또 한용운이 세운 묘표비는 묘역 인근 폐가 앞에 오도카니 세워져 있다.
이에 대해 단재연구가인 학자 A씨는 “만해 한용운이 세운 묘표비는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만해가 좋은 오석(烏石)을 구하고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위창 오세창의 글씨를 받아 세운 것이다. 1980년대에 이 비석의 내력을 처음 알게 됐을 때에도 금방 세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태가 훌륭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또 “도비로 세운 사적비 역시 유일한 피붙이인 장남 수범씨가 주축이 돼 역사적 고증을 거쳐 만든 것이다. 물론 당시의 고증이 불충분해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해체해 화장실 옆에 방치한 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다. 충북도와 청원군은 물론이고 문화재청도 관리책임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원군 “기념사업회 아니면 상대 안 해”
그러나 청원군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청원군 문화공보과 박장희 문화관광시설담당은 “새로 비석을 세우면 기존 비석은 땅에 묻는 게 맞다. 하도 말들이 많으니까 주차장을 정비하면서 적절한 공간을 조성해 철거한 석물을 일반인들이 볼 수 있게끔 전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족들이 단재기념사업회에 묘지 조성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공증을 통해 위임한 만큼 우리는 기념사업회하고만 상대한다. 도대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끼어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군 관계자는 심지어 후손들이 단재의 국적을 회복하려는 것에 대해 “후손들이 (단재의) 국적이 없어 방치된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폄훼하기도 했다.
단재기념사업회 신홍식 사무처장은 이에 대해 “청원군이 7000만원을 들여 토목공사를 벌였고 고령 신씨 종친회에서 3500만원을 내서 석물을 조성했다. 1944년 병사한 뒤 화장돼 한강에 뿌려진 박자혜 여사의 위패를 함께 묻는 ‘합폄(일종의 합장)’을 했기 때문에 ‘부인 박자혜 여사 부좌’라는 문구를 넣어 새로 묘비를 세운 것이다. 한용운의 묘표비나 72년 사적비는 나중에 묘역조성공사가 마무리된 뒤 묘정 한편에 전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새로 세운 사적비가 독립운동가 단재에 앞서 고령 신씨 문중의 위인으로서 단재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72년 사적비에는 선생의 가계에 대해 ‘본적이 고령(高靈)’이라고 간단히 기록한 반면, 새 사적비에는 ‘본관은 고령이며 세종조에 출사 집현전학사로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우고 성종조까지 주석지신으로 국가를 위해 충성한 문충공 신숙주선생의 후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새 사적비는 또 부인 박자혜 여사는 물론이고 두 아들 중 막내 두범이 일찍 죽고 장남 수범씨의 첫 부인인 안동 권씨가 6.25 당시 실종되자 며느리 이덕남씨와 재혼한 사실, 증손에 이르기까지 가계사를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단재연구가 B씨는 “단재는 국가적 위인이다. 문중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문중사적 관심에서 사적비를 만든 것은 문제가 있다. 단재는 자라나는 세대들이 표상으로 삼아야하는 인물인 만큼 객관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 새로 세운 것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기존의 사적비를 팽개치지 말고 그 의의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