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관 교수, 돌탑.작품 300점 등 포함

“내가 힘들어서 기증하겠다는 게 아냐. 땅 팔고 먹고 살면 편하게 생을 마감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작품들이 연속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또 무엇보다 충북도에 미술관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잖아.”
금속공예가이자 홍익대 교수인 고승관씨(66)가 지금까지 ‘쌓았던, 모았던, 소유했던’ 모든 것을 도립미술관 건립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노라 선언했다. 그가 이번에 밝힌 기증목록은 속리산 국립공원 자락 피거산(375m)일원 117,620㎡과 돌탑, 미술관 등록을 앞두고 있는 건물, 평생한 작업 300여점, 민속품 및 공예품 200여점 등이 포함돼 있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이곳에 도립미술관이 세워지는 것과 돌탑을 계속 쌓아올릴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어달라는 것”뿐이다.
21년전보다 땅 값 100배 뛰어
고 교수의 기부목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실로 엄청나다. 그가 87년 사둔 산과 땅은 지금 100배 정도 값이 뛰어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는 게 지인들의 말이다. 하지만 고 교수는 “땅은 주인이 따로 있고, 소유하려고 욕심내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한다.
고 교수는 21년 전 이곳 괴산군 청천면 도원리 49번지 일원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21년 만에 고 교수는 속리산 국립공원 자락 피거산(375m)을 한국 최대의 돌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변신시킨다. 서울에서 조형대학장까지 역임했지만, 이곳을 가꾸기 위해 일부러 조치원 캠퍼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지난 6월 정년퇴직했다. 그는 강산이 두 번 변할 때 300여개의 돌탑을 이곳에 심었다.
“밟고 있는 돌은 쓸모가 없지만, 탑으로 쌓아올려졌을 때 세상 어떤 돌보다 가치 있게 되지. 이 동네엔 돌이 많기도 해서 돌을 자원화 시키자고 생각했어. 내가 조형성을 다루니까 돌을 정으로 쳐서 모양을 만들어 하나하나 붙여갔지.”
시간성이 녹아든 그의 작업은 때로는 ‘야투’(자연미술의 한 분파)로, 때로는 순례자들의 안식처로 사람을 모았다. 홍수 태풍 등 자연재해에 한 번도 쓰러진 적 없다고 하니, 사람의 노동력으로 빚어낸 산물은 어느 덧 자연의 일부가 돼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뜻 보면 돌탑은 피거산의 봉우리처럼 보였다.
지역 문화기반 시설 너무 열악
서울이 고향인 그가 도원에 정착해 쉬지 않고 돌탑은 쌓는 이유는 뭘까. 그는 특별한 이유나 계기는 없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는 도원(桃源)리, 인근은 무릉(武陵)다. 무릉리와 도원리, 결국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그런 그가 이 무릉도원에 이젠 도립미술관을 건립하는 게 꿈이다. “미술에 대한 욕심을 다 버렸다는 게 아냐. 오히려 나이 드니까 사실 욕심이 더 나. 여전히 날마다 틈나는 대로 돌탑을 쌓고 있지. 이번 기증은 충북도가 지역민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환경자체가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결심한 거야. 사실 몇 해 전부터 벼르고 있었어….”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도원성 미술관을 만들었다. 돌탑 외에도 산자락에 높이 4.5m, 길이 130m의 대형 옹벽을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자신의 영역에 성을 쌓듯, 미술관의 이름처럼 도원성(桃源城)미술관을 건립하고 있는 셈이다.
고 교수는 “문화를 모르는 정치는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충북도가 최근 문화선진도를 발표하며 도립미술관 건립 얘기가 거론됐을 때 기증 결심을 구체화 시켰다고. “부지가 없어서 못 만든다고 하니까, 기부하겠다는 거야. 이곳은 전국에서 돌탑을 보러오고, 또 휴양지로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 그는 “미술관이 지어지면 이곳에서 국제 행사 및 국전도 유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두달 전에 충북도 관계자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고 교수의 기부 발언이 흘러 흘러 충북도에 들어왔고, 관계자들이 사전답사를 했다는 것. 하지만 충북도는 “도립미술관 건립 유무는 세세한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접근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밝혔다.
이에대해 고 교수는 “피아노 연주를 들으려고 왔는데 잘못 친다고 연주자를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수는 없다”며 선문답을 했다. 즉,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 없다는 얘기다. 이미 그의 기부 발언을 전해 듣고 타 지자체 및 관계기관들이 노크를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지역 정신문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는데,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지자체 수장의 마인드지. 미술관 하나 없다는 건 우리 지역의 수치야.”
돌탑에 담은 기록, 100년 후 꺼내려면…
돌탑이 있는 이곳은 그에겐 ‘보물산’이다. 돌탑마다 저마다 모양과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호부터 13호까지는 따로 비석을 세워두었다. 표지석에는 명함처럼 이 돌탑에 자료를 넣은 사람들의 이름이 써 있다. 지역방송국의 현황, 지역별 인구 및 기후 등 각종 데이터들이 ‘타입캡슐’처럼 저장돼있다.

고 교수는 그동안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공동체문화만들기에 힘썼다. 92년부터 사비를 들여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탑돌이와 남북통일기원제'를 열어 왔다. 주민과 예술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돌탑에 촛불을 꼽아 놓고 소원을 비는 탑돌이 행사를 가졌고, 또 진입로에 4000여개의 촛불을 켜 놓아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 97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청천중학교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교육환경이 열악한 농촌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하자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역시 자비를 털어 제자 10명이 함께 초·중학생 1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그림지도를 펼쳐왔다고.
마지막으로 고 교수는 “99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행사를 끝내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공예비엔날레 처음 시작할 때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다들 말렸는데, 결국 10년이 지난 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잖아. 문화가 갖는 경쟁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