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찾으러 갔다가 끌려간 유부녀 등 ‘질곡’의 역사
<오마이뉴스>는 북한의 ‘종태위’가 발간한 <짓밟힌 인생들의 웨침>에서 공개증언한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몇몇 개인사를 정리해 표로 제시한다. 이들이 증언한 개인사의 일부 또한 왜 이들이 부모를 등지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암시하고 있다.
이들은 한편으로 ‘전쟁포로’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이다. 따라서 이들의 개인사는 북한에 거주하는 이산가족 관련 신상정보를 제공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론에 ‘북으로 간’ 혹은 ‘북에 남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개인사가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증언집 표지인물 정금옥 할머니도
경북 영일군 출신
‘종태위’가 발간한 <짓밟힌 인생의 웨침>의 책 표지에 사진이 실린 정금옥 할머니(남포시 룡강군 삼화리)는 남한 출신이다. 경북 영일군 신광면 사흡동 출생으로 9세 때부터 여관집 종살이를 하던 정씨는 15세 때인 1939년 어느 봄날 일본군 장교에게 강제 연행되어 중국 다롄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정씨는 첫날 일본군 장교가 한 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희들은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전장에서 고생하는 일본군을 잘 위안하는 것이 바로 너희들의 임무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일’이 무엇이며 ‘위안’이 무슨 말인지 몰랐던 정씨는, 속옷도 없이 일본식 겉옷만 걸치게 하고 머리채를 잘린 다음 판자로 칸막이를 한 방에 밀어 넣어졌다. 광복 후 정씨는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그밖에도 ‘종태위’가 발간한 증언집의 문헌분석을 통해 리복녀(함북 화성군 극동노동자구) 박복이(함남 신포시 호남리) 리현숙(황해도 사리원시 미곡리) 김군숙(평북 피현군 대평리) 강영숙(평북 운전군 월현리) 최순환(강원도 통천군 미평리) 황선옥(남포시 와우도구역 령남리) 강길순(황남 연안군 소아리) 곽금녀(함남 단천시 신동리) 김복순(전북 부안군 줄포면 행경리) 김덕순(평북 신의주시 동상동) 황소군(평양시 강동군 대리노동자구) 김향숙(함남 단천시 양산동) 심청옥(함북 회령시 원산리) 고재련(함남 함흥시 성천강구역) 조삼순(함북 경성군 경성읍) 등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남한 출신임이 확인되었다.
이들 남한지역 출신 위안부 피해자 17명 가운데 13명(76.5%)은 중국과 소만국경 등 북방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했고, 나머지 4명(23.5%)은 대만(박복이), 미얀마(조삼순), 싱가포르(리현숙), 인도네시아(강길순) 등 남방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했다. 따라서 북방지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여성들의 일부는 귀국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북한지역에 체류·거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한 출신 피해자의 76%는
북방지역에서 생활
그러나 당시 귀국한 남한 거주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절반 이상이 선박을 이용했고, 주로 부산·인천을 통해 귀국했음을 감안하면 상당수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북쪽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남방지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여성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명백히 더 적극적으로 북쪽을 선택한 경우이다.
리복녀씨는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 태생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살길을 찾아 중국 동북부의 무단강까지 갔다가 1942년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경남 진주 태생인 박복이씨는 진주시 문산개화동 구장이 일본으로 보내주겠다고 속여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대만의 ‘기꾸사이로’ 일본 항공군 병영으로 끌려가 일본군 조종사들을 ‘상대’했다. 박씨는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으로 돌아와 1960년에 17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
서울시 동대문 태생인 리현숙씨는 18세에 관부연락선을 탔다가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으며 구사일생으로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모가 이미 세상을 뜬 뒤여서 “과거에 대한 수치심으로 고향에 살 수 없어” 같이 끌려갔다가 살아남은(19명 중 2명) 유일한 동무와 함께 황해도 송림으로 갔다.
서울서 여학교에 다니다 ‘처녀사냥’에 걸린 김군숙씨
역시 서울 태생인 김군숙씨는 여학교에 다니던 1938년 9월 어느날 동창생인 경숙, 영자와 함께 시내 공원에 놀러갔다가 일제의 ‘처녀사냥’에 걸려 부산을 거쳐 중국 선양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함께 간 두 동창생은 일본군에 반항하다 살해당했다. 김씨는 “구사일생으로 도망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매춘업자들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있던 종군위안소처럼 보초병도 가시철조망도 없었다. 종군 위안부 만행은 매춘업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당시 일본 당국의 조직적인 범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남 나주군 삼도면 출생인 강영숙씨는 1933년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결혼한 기혼자의 몸으로 1942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 납치되어 위안소로 끌려갔다. 강씨는 1944년 가을에 도주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45년 12월까지 살다가 고향 대신 북한을 택했다. 서울 노남동 태생인 최순환씨는 부모를 여의고 서울시내의 한 식당에서 접대부로 일하다 1942년 6월 한 일본인의 꼬임에 속아 중국으로 갔다가 위안소 생활을 했으며 1947년 중국에서 남편을 만나 1950년 함북 회령으로 들어왔다.
남편 찾으러 갔다가 끌려간 천안 출신 곽금녀씨
경북 청도군 출신의 황선옥씨는 40명의 증언자 중에서 유일하게 미혼남자와 결혼해 오래 동안 치료를 받아 아들을 낳았으나 1950년 전쟁통에 아들과 남편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양딸로 데리고 키운 시형의 딸의 부양을 받고 있다.
충남 천안군 백이리 출신의 곽금녀씨도 보기 드물게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았으나 남편이 징병을 당해 만삭의 몸으로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가 평북 선천군에서 아이를 낳게 되어 분단으로 이북에 눌러앉게 된 기구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곽씨는 “일본 놈들은 나의 청춘과 육체를 망쳐놓았을 뿐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고 혈육마저 갈라놓은 철천지원쑤다”고 증언하고 있다.
경남 함양군 금봉면의 한 막벌이 노동자의 6자매 중 둘째로 태어난 황소군씨는 뼈가 굳기 전부터 생활전선에 나섰다가 18살 되던 1936년에 “돈벌이가 잘되는 공장에 알선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꾐에 빠져 한 일본인을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를 데려간 곳은 중국 목단강 지역의 군수공장이 아니라 그 군수공장 근처의 ‘위안소‘였다. 황씨는 1943년 7월 위안소를 탈출해 한 조선 사람 집에 숨어살다가 해방된 후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 또한 ‘어지러워진 몸’ 때문에 고향을 등졌다.
“1945년 8월 조선이 해방된 후 나는 조선으로 나왔지만 일본군 놈들에 의하여 어지러워진 몸인 것으로 하여 고향에는 갈 수 없었다. 나는 강동 땅에서 ‘위안부’ 생활의 후유증으로 39살까지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지난날의 생활을 숨기고 아이 4명이 있는 박은홉의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일본놈들은 나의 청춘을 망쳐놓았으며 나를 폐인으로 만들어놓았다…(중략)…내가 70 고령이 되도록 살 수 있는 것은 당과 수령님의 배려 밑에 무상치료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북에 연고·자식 없어 어려운 생활
황소군씨의 증언대로 북으로 간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은 대부분 연고가 없는 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해 노년에 보호자 없이 혼자 살거나 병들어 보호시설에 기거하지만 “당과 국가의 배려로 매달 식량과 보조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북 남원 출신인 김덕순씨도 “지금 나는 누구나 다 고르롭게(고르게: 필자 주) 잘사는 고마운 사회주의 조국의 품에서 국가로부터 연로보조금과 무상이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식량을 공급받으면서 식의주에 대한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곤란한 식량사정에 비추어 이들의 증언과 달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음을 불문가지의 일이다.
‘정대협’ 부설 ‘전쟁과 여성인권센터’(소장 정진성)가 여성부의 지원을 받아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증언통계 자료집>에 따르면, 지난 93년 처음 신고를 받은 이후 2001년 12월 현재 한국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는 203명이다. 물론 그중 상당수 할머니들이 사망했다. 한편 20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에서 발표한 홍선옥 ‘종태위’ 위원장의 ‘기조보고’에 따르면 북한의 경우 신고 피해자 218명 가운데 공개증언자는 47명(21.6%)으로 지난 2년 동안 추가로 겨우 4명이 더 늘었을 뿐이다.
지난 2000년 10월 평양에서 당시 황호남 종태위 서기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피해자 218명 중에서 그때까지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1995년부터 집중된 자연재해와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의 통신·행정망의 미비와 인력난을 반영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관계자들이 피해자들이 거주하는 현지에까지 직접 ‘다리품’을 팔지 않고서는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려울 만큼 행정망이 미비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선옥 위원장의 ‘기조보고’에 따르면, 공개증언에 나선 여성 47명 가운데 21명(44.7%)이 사망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