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 연꽃 저수지 매입하고 2년동안 공사
1937년 도청건물 완공 당시 가장 아름다운 건물
1908년 충주에 있던 관찰사(도청)가 청주로 옮겨와 중앙공원과 주변 관아 건물에서 도정 업무가 시작됐다. 1935년 한국인 도지사 김동훈(金東勳)씨가 「잉어배미연꽃방죽」을 메워 2층 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는데 이 때부터 제대로 된 충북 도정 업무가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47년 신년 인사말에 윤하영 도지사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 하사비민(何事非君 何事非民)이라는 중국고사를 인용한 것이 불씨가 되어 국민일보에 대서특필 되면서 여러 가지 잡음 끝에 윤하영 초대 도지사는 끝내 파면됐고 2대 도지사로 독립운동가였던 이광(李光)씨가 임명됐다. 이광 도지사는 6ㆍ25 전란으로 도정이 부산으로 피난 가야하는 고충도 겪었고 1951년 5월 26일 빨치산들이 청주에 침투, 만행을 저지른 사건으로 인해 국회의결에 의해 파직되는 불운도 겪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군인 출신의 고광도 준장이 11대 도지사로 임명돼 군대식의 즉결 심판을 행정 업무에 도입, 빠른 행정을 실천했고 37세의 최연소 소장으로 기록된 최세인 12대 도지사는 1년 9개월간 도정을 무난히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13대 신명순, 제14대 김효영을 거쳐 장신의 , 정해식 도백이 취임하면서 청주 중심에 간선도로가 뚫렸고 청주대교도 준공됐다. 16대 도지사인 태종학 도백은 재임 중 단양 수해로 인해 재임 기간 대부분을 복구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군인 출신의 도지사인 오용운 도백과 청와대 새마을 담당관 출신이었던 정종택 도백은 타고난 성실함으로 도정 발전에 힘썼고 정지사는 충북도개발기금을 조성, 문화예술과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중앙 관료 출신인 19대 김종호 도지사는 ‘위민봉사?’라는 기치아래 좀 더 도민들에게 다가가는 정책을 폈고 이후 임성재 , 강우혁 , 노건일 , 민태구 , 주병덕 도지사도 마찬가지로 충북 발전과 대민 봉사를 위해 많은 정책을 펼쳤다.
24대 주병덕 도지사는 1990년 전국체전 준비 때 충주댐에 물을 가둬 수해가 발생하는 불운으로 해임됐지만 민선 29대 도지사가 되어 청주공항과 오창과학단지 건립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25대 이동호 도지사는 1990년 전국체전을 무사히 치뤘고 26대 이원종 , 27대 김덕영 , 28대 허태열 도지사는 임명 도지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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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로 가득찬 도청 1930년 2층 건물로 지어졌던 도청건물이 인구가 늘고 부서가 늘어나면서 서쪽으로 옮겨갔다. 경찰국 동쪽의 부속건물 뒷쪽에 도의회 회의실과 사무실이 배치돼 비좁은 현상을 보이고 있다. / 1998년 촬영 | ||
1935년 2층 건물로 시작한 도청은 늘어나는 행정 업무를 위해 본관을 3층으로 증축했고 서쪽에 경찰국을 3층에서 5층으로 높이고 동쪽에 4층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지방자치로 도의회가 개원되면서 본관 뒤쪽에 7층 건물이 새로 들어섰는데 이것이 지금의 도청 모습이다.
광복 당시 도정은 내무, 학무, 사회, 농업, 상공, 경찰국 등 6개국 23개과였던 기구는 현재 8개국 38개과로 바뀌었고 도 직속기관 및 사업소, 도의회 사무실 등 방대한 조직에 수많은 공무원들이 종사하고 있어 외적, 내적으로 규모가 광복 당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지금까지 충청북도의 도정을 도지사의 행적을 중심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봤다. 어떤 도지사든 충북의 발전을 위해 애쓰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시작되면서 정당 공천을 겪은 정치색이 짙은 인물들이 선출되면서 순수하게 충북의 발전을 위해 고민해야 할 도지사들이 정당의 이해관계에 빠져 충북이 소외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무쪼록 앞으로 충청북도를 이끌 도백들은 지방자치제도의 본래 취지에 맞게 150만 충북도민의 염원과 충북의 발전만을 위해 불철주야 힘써주길 바랄 뿐이다.
/ 前 언론인·프리랜서 사진작가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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