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혁 상 충북인뉴스 편집장

   
지난 5·18주간을 맞아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기사 한 꼭지가 인터넷 포탈사이트를 달궜다. 제목은 ‘이목 쏠리는 全씨의 외출’. 내용은 전씨가 20일 서울 극동방송의 개국 50주년 기념행사에 축사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광주 민간인학살의 책임자인 전씨가 희생자 추모주간에 외부의 공식행사에 참가한다는 것은 당연한 논란거리였다. 정부가 공식요구한 국가 훈포장 반납을 거부하고,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 2205억원에 대해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밝힌바 있는 전씨는 이미 주변의 논란을 초월한 경지(?)인 지도 모른다.

여론이 악화되면서 전씨의 행사참가는 불발됐지만 필자는 지난 5월초 숨진 한 남자의 모습을 내내 지우지 못했다. 피폐해진 정신과 육체를 술에 의지하며 살다 인생 오십고개도 넘기지 못한 남자. 故 이성우씨(48)는 청주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경남대 무역학과에 입학해 청운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79년 군입대 직후 육군 20사단(사단장 박준병) 60연대 2대대에 배속되면서 그의 운명은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80년 5월, 이씨가 속한 부대는 광주 현지로 출동해 진압군이 됐고 30일간의 피비린내나는 ‘화려한 외출’은 마음여린 이씨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광주 퇴각이후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원대복귀뒤 작성한 ‘수양록’의 내용이 문제가 돼 군대감방까지 경험했다. 제대후 대학에 복학했으나 동료학생들과 나눈 광주 ‘경험담’이 교내 사찰형사들에게 포착돼 ‘찍히는’ 처지가 됐다.

생전에 필자와 인터뷰했던 이씨는 “학기초에 자취방에 있는데 형사 두사람이 찾아와서 잠깐 경찰서까지 가자며 끌고 갔다. 그러더니 광주 얘기한 것에 대해 자술서를 쓰라고 했고 이때부터 형사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나를 감시했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보안부대까지 강제연행 당하는 바람에 이씨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자퇴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씨는 자신감을 상실한채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정상적인 직장생활도 할 수 없었다.

부모의 권유로 결혼은 했지만 원만한 가정을 이루지 못해 아내와 이혼했고 외동딸도 함께 떠났다. 이씨의 심신상태가 급격히 무너진 계기는 지난 88년 국회의 광주청문회 TV생방송이었다. 광주 유혈진압의 장본인들은 청문회장에서 한결같이 책임을 회피했고, 보다못한 이씨는 안방에 있던 TV수상기를 마당으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이후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지만 이씨의 5월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80년 광주와 관련한 뉴스, 특집프로그램을 보고나면 이씨는 어김없이 술을 찾았고 5공 권력자들에 대한 울분을 터트렸다. 필자는 이 무렵(95년) 이씨를 처음 만났고 ‘5월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진압군’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작성됐다.

알콜중독과 심신불안 증세로 정신병원과 집을 오락가락했던 이씨는 지난 4월말 모방송국의 취재요청 전화를 받고 평정심을 잃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취재협조를 거부한 이씨는 자신의 골방에 틀어박혀 밥도 거른채 몇일동안 술만 마시다 잠자듯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의 장례는 화장으로 치러졌고 지난해 10여년만에 해후한 대학생 외동딸이 ‘야속한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로 시작하여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로 끝나는 시가 있다. 한국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가 지난 87년 ‘전두환 대통령 탄신 58회 축시’로 바친 것이다.

“고인이시여, 총칼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무고한 생명을 다치게 했던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총칼로 얼룩졌던 부끄러운 역사를 망각해가는 우리들의 영혼을 깨워주소서. 부디 총칼 없는 새 세상에서 편히 영생하소서” 생전에 고인의 술 한잔을 마다했던 내 죄값이, 어떤 추모시를 바쳐야 용서될 지, 착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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