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현 (삶과노동을잇는배움터 이짓)

 

오송 궁평2지하차도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사고 현장 인근에 ‘희생자 기억의 길’이라는 현판이 설치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현판을 두고 일부 주민들은 “혐오시설”, “죽음을 상기시킨다”, “지역 이미지에 악영향”, “외부세력의 개입” 등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사의 흔적은 때때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동네가 비극과 연결되는 것이 두렵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공간 위에 새겨지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 감정에는 일상에서 고통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나 기억이 불편하다고 해서 지워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공간은 혐오시설도 아니고, 지역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추모의 장소만이 아니다. 기억공간은 사회가 어떤 책임을 다하지 못했는지, 무엇을 반성하고 바꿔야 하는지를 묻는 장소다.

오송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폭우는 예고됐고, 통제는 지연됐으며, 구조는 실패했다. 지하차도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재난 대응에 무감했던 정부와 우리 사회가 지키지 못한 생명이었다.

그날의 죽음은 ‘자연재해’가 아닌 ‘사회적 재난’이었다. 그래서 고통의 기억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남겨져야 한다. 만약 사회가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억을 밀어낸다면, 같은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변화를 만들 수 없고, 변화 없는 사회는 재난 참사의 순환을 끊지 못한다. 현판 하나조차 세우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억은 반복을 막기 위한 장치다

세계 곳곳에는 재난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2008년 중국 쓰촨 대지진 당시 무너진 학교와 마을 일부는 철거되지 않고 ‘기억공원’으로 보존되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큰 피해를 입은 미국 뉴올리언스에도 당시의 피해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다. 박물관에서는 재난의 기억을 전시하며, 생존자들의 증언과 사진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전시는 단순히 상황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저소득층과 흑인 공동체가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었는지 그 구조적 원인도 함께 설명한다.

이를 통해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겪은 깊은 상처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사회가 함께 듣고, 기록하고, 공감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렇듯 기억공간은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되묻고, 공동체가 무엇을 놓쳤는지 질문하는 공공장소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고통을 직시하는 기억이야말로, 다시는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의 약속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기억이 없는 사회에서는 책임도 사라진다

궁평지하차도에 세우려는 ‘희생자 기억의 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지역에 흠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고통을 기억하고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세우려는 것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잊지 않겠다’는 사회적 다짐이다.

한국 사회는 반복해서 참사를 겪어왔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세월호, 이태원, 아리셀 참사까지.

이 재난들의 공통점은 늘 같다. ‘예측 가능했고,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경고는 무시됐고, 조치는 늦었으며, 책임은 흐려졌다. 그리고 기억은 너무 빨리 지워졌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는 무책임이 채운다. 현판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희생자 기억의 길’은 단지 과거를 붙잡는 표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묻는 책임의 출발점이다. 기억을 밀어낼수록, 사회는 점점 더 위험해진다.

하나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언론은 일부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과도하게 부각하거나 상세히 묘사하면서, 마치 피해자들과의 갈등인 양 보도하지 않길 바란다. 기억공간을 둘러싼 갈등의 본질은 피해자와 시민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참사 이후 2년 동안 책임을 방기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해온 충북도와 청주시, 그리고 사회 전체의 책임 회피 구조에 있다. 또한 기계적 중립을 앞세운 보도는 기억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외면하려는 구조를 동일선상에 놓는다. 이는 사실상 중립이 아니라, 진실의 왜곡이다. 그러한 보도는 재난 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실천하는 피해자들과 시민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한국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가 제정한 『재난·재해 보도준칙』은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언론은 재난의 고통을 보도함과 동시에 사회적 치유와 재발 방지 논의를 공론화할 책임이 있다.”

‘희생자 기억의 길’을 둘러싼 논란을 보도하려 한다면, 그 보도가 책임 구도를 명확히 드러내고, 공공성 회복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꼭 되물어 주기를 요청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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