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살기 위해, 우리가 기후정의 연속기고⑤

지역에서 기후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충북지역 노동자들이 928충북노동자기후정의행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릴레이 연재를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역에서 존엄하고 평등한 일터와 삶을 만드는 기후정의의 목소리가 더 많은 시민들에게 가 닿기를 바랍니다. 【9·28 충북노동자 기후정의행진】

글 : 채효정(기후정의동맹)

 

지난 3월 30일, 나는 충남 태안에서 열린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330 충남노동자 행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집회 도중 한 총선 후보의 인터뷰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는 ‘탄소세’를 도입하고, ‘녹색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기후정의를 이루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총고용 보장을 외치고 있는데, 녹색 일자리만 말하다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정부가 발전소 폐쇄로 일자리를 잃게 될 노동자들에게 직업 전환 교육을 제공하고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이 알아서 각자 녹색 일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총고용 보장’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러니 물어야 했다. 그건 ‘어떤 녹색 일자리’일 것인가? 정규직인가, 일용직인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 지구 종말이 닥친 마당에 자기 일자리만 요구하는 거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 닫는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기후위기는 몇 년 후에 죽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해고는 당장 내일 죽는 일이다. 게다가 주위 곳곳에 문을 닫은 상점들과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젊은이들, 대출금을 갚지 못해 모진 마음을 먹는 사람들을 보라. 지구의 생태적 붕괴는 사회의 붕괴를 통해 더 직접적으로 체감되고 가시화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지구 멸망보다 지역 소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일자리에 대한 질문은 개인적인 것이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에 대한 질문이자 모두가 직면한 삶의 위기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논의와 계획에는 노동자의 참여와 주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녹색인지 물어야 한다

민주노총충북본부 박옥주 본부장 등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조합원들에게 기후정의행진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민주노총충북본부 박옥주 본부장 등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조합원들에게 기후정의행진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 ‘녹색 일자리’란 녹색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직군으로 정의된다.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 건설 노동자와 엔지니어, 전기자동차 생산 노동자와 판매자, ‘저탄소 농업’이라 불리는 수직농업 노동자와 관리직, 녹색 금융과 투자 중개자 등 ‘녹색 산업’으로 분류된 영역에서 일하는 직업들이 보수, 처우 관계없이 모두 ‘녹색 일자리’로 분류된다. 그러나 ‘괜찮은 녹색 일자리’는 매우 제한적이고 장벽도 높다. 일자리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자기 분야와 동떨어진 직업군이나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은 살아온 곳에서 계속 일하고 살고 싶다. 무엇보다 노동자를 위한 정책이라면서 정작 노동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만들면, 그게 노동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은 어떤 것이 녹색 산업인지, 그 기준을 만들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녹색 산업과 녹색 기업을 분류하고 인증하는 기관은 대부분 북반구의 평가 기관들이고, 이들의 선정 작업에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정치적으로 조율되는 과정이 개입한다. 예를 들어 유럽 연합에서 채택한 ‘녹색 분류체계(그린 택소노미)’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핵 발전을 녹색 에너지로 분류한다. 이런 분류체계는 노동자 민중의 안전한 삶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안전한 투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하고, 녹색 시장을 확대하고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기차나 에너지 산업뿐만 아니라 탄소포집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나 폐기물 처리 산업, 공장식 수직 농장, 대체 식품 개발 등 다양한 기후 관련 테크 기업들이 녹색으로 분류되며, 여기에 투자하는 행위가 ‘녹색 투자’, ‘녹색 금융’으로 인정된다. 그러니 정부와 기업, 전문가들이 붙여 놓은 ‘녹색’이란 이름의 제도와 정책, 기술과 산업들이 말 그대로의 녹색인지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되묻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후정의 중심에 지역과 현장운동이 서야한다.

 

에너지 전환은 잘못되어 가고 있는 녹색 전환의 대표적인 분야다. 태양과 바람의 에너지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한 지역을 희생시켜 대규모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고압송전탑을 통해 멀리 떨어진 공장과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방식과 반대되는 에너지 체제였을 것인데, 지금 자본은 재생에너지도 화석연료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한다. 우리는 무탄소 에너지라는 이유에서만 재생에너지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전환 운동은 탈핵 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거대한 규모의 생태파괴 없이 주변에서 쉽게 접근하고 조달할 수 있고,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넘칠 때 마을과 도시 차원에서 의논하고 대응할 수 있으며, 우리의 편리를 위해 멀리 있는 누군가의 삶을 짓밟지 않아도 되는, 생태적이고 민주적이며 자급과 자치가 가능한 평화로운 에너지이기 때문에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대안 에너지에 대한 상상을 좌절시킨 것은 자본 주도의 에너지 전환이다. 양적 확대에만 치중한 에너지 운동도 재생에너지를 화석연료 못지않게 불평등과 부정의를 야기하는 에너지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기후부정의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낳고,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내도 모자랄 판에 전환을 더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상황은 전환의 주체와 방향, 원칙을 누락한 채 양과 속도만 강조할 때 그것이 어떻게 더 큰 위험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에너지 민영화와 기후부정의를 폭로하고 저지하려는 노력도 노동운동과 공공에너지 전환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은 그토록 파괴하려 했던 이유이고, 반대로 노동자 시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사회를 지키는’ 보루로 기능하도록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다. ‘기후정의’란 용어는 남반구 민중운동에서 생겨난 것이고, ‘정의로운 전환’은 노동 운동에서 제기된 개념이란 것도 기억하자. 지금 이 용어는 기후 대응의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는 보편적인 구호로 외쳐지고 있다. ‘이대로 살 수 없다’, ‘함께 살기 위해 멈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와 같은 기후정의의 말들도 국가, 자본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기후위기를 삶의 위기로 재구성한다.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고 기후정의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노동자 민중의 인식과 감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역과 현장의 운동이 기후정의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여기 사람들’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운동의 ‘전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역을 모르는 이야기’라며, 정의로운 전환이 아니라도 탄소중립 녹색성장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분들도 있다. 국회도 있고, 대규모 시위도 열리는 서울과 달리, 여전히 토건 세력 지방 토호들이 판치고 지역 경제 살린다며 지자체가 나서서 생태 파괴와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지역은 상황도 너무 다르고 여기에 맞서는 시민사회나 운동의 역량도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위기가 더 크게 드러나고 재난이 더 치명적인 곳일수록, 여기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이곳의 상황’도 바꿔낼 수 있을 것이다. 9월 28일 청주에서 열리는 ‘928충북노동자기후정의행진’은 바로 그 ‘여기 사람들’의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자리다. 9월에 충북 노동자들이 기후정의 행진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지역에 살지만 그래서 반가웠다.

국가 차원에서 바라보는 지역, 자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환의 설계도는 숫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하지만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구나 탄소배출량, 일자리 수 등으로 측정될 수 없는 구체적인 삶과 위기의 지도를 가지고 있고, 그 지도 위에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다. 지금처럼 IPCC의 통계자료에 기반한 수치나 지켜지지 않는 국제기후협약의 합의 목표를 매번 전문가들이 조정해서 위에서 아래로 할당되도록 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역과 현장에서 수립된 요구와 계획이 정책과 제도가 되고 국가적 목표를 만들도록 아래로부터 위로 압박해나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기후정의운동의 대중적 장으로 정착되어 해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9월 기후정의 행진도, 더 많은 지역으로부터의 행진들이 결집하는 행진이 되고, 노동자 행진, 농민 행진, 학생 행진, 청소년 행진, 홈리스 행진, 실업자 행진, 페미니스트 행진, 동물 행진 등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이 처한 위기를 말하며 함께 싸우자고 모이는 ‘행진들의 행진’이 되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928충북노동자행진이 운동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는 ‘운동의 전환’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노동운동과 기후정의운동의 한발 전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누락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주체가 되고, 노동자가 앞장서서 기후정의와 체제전환의 길을 여는 새로운 싸움을 충북에서 시작해보자. 여기서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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