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관료 민영휘 후손들이 13만여평 소유
아들 민대식·민규식도 일제 재벌로 친일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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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상당산성 사적공원화 사업이 여흥 민씨 후손 소유의 사유지 매입을 둘러싸고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산성내 사적지의 최초 소유권 등기자가 일제로부터 작위(자작)를 수여받을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한 민영휘의 아들 민대식씨(작고) 등으로 밝혀져 국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 제정을 앞두고 논란이 예상된다.
명성황후 민씨 족친인 민영휘는 구한말 평양감사, 주일공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최근 공개된 일제의 ‘조선공로자명감’에 이름이 오른 친일관료였다. 조선공로자연감은 1935년 일제가 조선강점 25주년 기념사업으로 총독이 간행회 위원장을 맡아 민관 공로자 2560명을 소개했고 이 가운데 한국인 353명이 포함됐다.
또한 상당산성 최초 토지 소유주인 민대식씨는 민영휘의 아들로 일제 당시 미국 유학을 마친뒤 은행, 기업을 운영하며 1930년대 조선 최고의 갑부로 불렸다. 특히 민대식 민규식 형제는 상해 임시정부가 작성한 국내 친일인사 명부에 일제 거액 헌납자로 분류돼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상당산성 민씨 사유지를 둘러싼 논란의 실체를 알아본다.
청주시는 지난 2000년 상당산성 사적공원화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4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성곽을 보수하고 관아, 병기고, 포루, 훈련장, 민가 등을 복원하는 대대적인 사업이다. 시는 토지매입을 위해 산성동 일대 사유지 조사를 벌인 결과 224필지에 66만4천평방미터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2/3에 해당하는 44만1400평방미터가 민영휘 후손들의 소유 토지로 확인됐다.
경매처분 된 1/3지분 청주시 낙찰받아 
산성내 임야인 민씨 소유 토지는 지난해 9월 감정가가 14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는 민씨 가족들과 매입협의를 진행하던중 해당 토지가 법원 경매처분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지난해 10월 입찰에 참가해 전체 1/3지분을 4억6300만원원에 낙찰받았다. 후손들간에 권리관계가 복잡한 매입대상 사유지를 경매를 통해 손쉽게 확보한 셈이다. 하지만 나머지 2/3지분을 추가매입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청주시 관계자는 “해당 사유지에 선친 묘소 등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민씨 후손들이 매각에 적극 나서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내년도에 추가매입 예산을 편성해 매입을 다시 추진하겠지만 상속권리자들이 많아 내부적인 의견통일이 제대로 이뤄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적지인 상당산성내 토지가 사유지로 변질된 경위가 석연치않고 소유자가 일제 고위관료, 재벌기업인으로 친일행적이 뚜렷하기 때문에 국회가 입법추진하는 친일재산환수 특별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민씨 후손들이 소유한 산성 토지의 등기부상 권리이전 내용을 보면 국유지→일본인→계성주식회사→조선신탁주식회사→민씨 후손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국유지가 민간 소유권으로 바뀐 경위에 대해 일제가 1911년 제정한 산림령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국유임야 민간대부가 가능하도록 법령을 제정해 일본인의 임야소유 길 터놓아 거대 산림지주 출현이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조선 최고 갑부로 불렸던 민씨 형제
민영휘의 아들인 민대식, 민규식은 계성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에 상당한 규모의 땅을 사들여 관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김성수교수가 저술한 ‘세계화 시대를 위한 한국경제의 발전’ 책자 내용 가운데 일제 당시 민족기업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인용한 내용이다.
『한말의 귀족출신인 민씨계 재벌은 부동산투자와 은행업에 중점을 두고 기업을 경영하며 재벌형성을 이룩한 한말의 귀족출신 민대식, 민규식 등으로서 한국 최초의 민족계 재벌로 탄생하였다. 이 양인이 대표가 되어서 기업활동을 전개한 회사는 영보합명회사(불입자본금 2500천원) 계성주식회사(2000천원) 동일은행(2775천원) 조선견직주식회사(500천원) 등으로 이 4개 회사의 불입자본금이 도합 7775천원에 이르고 있다. 민씨계의 재산은 대부분 토지였으며 이 토지를 토대로 하여 기업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주로 토지 및 건물 등 부동산투자와 민족은행인 동일은행을 경영하고 있었다』
일제당시 금융업으로 재산을 축적한 민대식은 중일전쟁 직후 귀족·고급관리 부인들의 금비녀 수집을 목적으로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등 재산헌납을 통한 친일행위를 벌였다.
애국금차회의 발기취지문을 보면 이 모임의 친일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배신(背信)과 모일(侮日)을 일삼는 지나(支那)를 응징하는 동시에 동아(東亞) 영원의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야 방금 전선(戰線)에서 활약하고 있는 황군(皇軍)에 대한 총후(銃後)의 가정을 위문하는 동시에 국방(國防)에 대한 비용에 만분의 하나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려는 취지하에 탄생되는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 발기인회를 준비하는…』
민씨 후손, 종친 묘 내세워 매각거부
또한 동생인 민규식과 함께 ‘황군 양성소’인 만주 봉천동광학교 설립 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봉천동광학교는 1937년 설립되어 해방을 맞을 때까지 운영되었고 ‘만주 조선인의 정신도장’으로 ‘황군 양성소‘로 만들기 위해 친일 조선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했다. 후원회에 소개된 두 형제의 직함만으로도 친일행적을 판단하기 충분하다. 민규식(閔奎植, 반도무훈현창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동일은행대표 취체역, 조선실업구락부) 민대식(閔大植, 동일은행장, 조선미곡주식회사 대주주, 경성상공회의소 보결부회장, 경성방송 평의원, 조선대아세아협회 임원)
아버지인 민영휘는 지난 7월 발표된 일제 비행기 헌납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민비의 족친으로 권세를 누렸던 민영휘는 1906년 휘문고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한데 이어 부인 안유풍의 ‘풍’자를 따서 풍문여고를 설립했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철거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민영휘는 당시 아들 민대식을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 민규식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보내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는 한용운이 자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민영휘에게 돈을 받은 일화가 알려지기도 했다. 한용운이 민영휘를 찾아가 돈을 요구하자 거절했고 이에 권총을 들이대자 파랗게 질리면서 돈을 주겠다고 했다는 것. 그러자 한용운은 권총을 민영휘에게 건네주었고 장난감 권총임을 알고 실소했다는 것.

